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by Vaneetha Rendall Risner2019-06-11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고난의 풀무 불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당시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제발 잠 좀 편히 자기를, 매일 밤 소원했다. 딸들이 느낀 슬픔도 여러 모양으로 표출되어 각자의 삶을 망쳐 놓았다. 내 몸은 점차 쇠약해졌고, 혼자서는 옷을 입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고, 혹 이야기를 나눈다 한들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내가 겪는 고통을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의 일부도 덜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고통이 익숙하진 않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각자의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들만의 풀무 불을 견디고 있을까? 또 나는 어떻게 그 뜨거움을 견디고 여기까지 왔을까?


분명 하나님은 불길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신다. 즉 인생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우리를 거룩하게 정화시켜 그분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든다. 다른 무엇도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더 강한 믿음을 품고 이전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간절히 그분만 의지하게 된다. 물론 그 시간이 쉽진 않다.


숨쉬기조차 힘들다


고난의 풀무 불에서, 나는 조금도 걷지 못함을 느낄 때가 많다. 끝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앞을 향해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 열기가 나를 질식케 할 만큼 강렬해지면, 은혜로 견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도대체 이 풀무 불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숨쉬기조차 힘들 때가 많다. 과연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지, 아니면 연기가 결국 내 숨통을 조일지 알 수 없다. 이 싸움은 매순간마다, 매호흡마다 계속된다. 풀무 불에서는 내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살아남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므로, 그분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일지라도 이 자욱한 연기를 나와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는다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홀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시 마음껏 숨쉴 수 있는 날이 올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건져 내실까?’


이런 마음으로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 연기를 거두어 달라고 간청한다. 뜨거운 열기 좀 가라앉게 해달라고, 이 풀무 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내 안에 있는 걱정과 염려를 그분께 아뢴다. 그분이 무엇을 해주셨으면 좋겠는지 말씀드린다. 그러고는 성경을 열심히 살펴보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뭐가 있을까 찾는다. 무엇이든, 어떤 구절이든, 붙들 수 있는 말씀을 말이다.


하나님 말고 무엇이 중요할까


이러는 사이 어느덧, 나는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심장도 더 이상 쿵쾅거리지 않고, 넘쳐 나던 번민도 멈췄다. 나도 모르는 사이 풀무 불을 벗어나 몇 분 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상쾌하다. 더 이상 숨이 막히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폐 속 깊숙이 맑은 공기가 스며듦을 느낀다.


이윽고 나는 미소를 짓을 수 있는 상태까지 나아간다. 이는 마음에 소망이 차오르고, 중압감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 말고 뭐가 그리 중요할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내가 전에 보지 못했던 진리를 보여 주신다. 나한테 말씀하신다고 느껴지는 성경 구절을 찾아 밑줄을 긋고, 차분히 앉아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정적이 흐르는 거룩한 순간에 아무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그 시간에만 집중한다. 또 어떤 때에는 내게 주신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노트에다 뭔가 휘갈겨 쓰기도 한다. 그러면 곧 알게 된다. 성경 전체는 그분이 주시는 약속과 소망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내가 전에 읽었던 본문, 경건의 시간을 서둘러 가지려다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본문이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의미를 맛보기 위해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는다. 느린 걸음 속에서 점차 그 맛은 내 입에 꿀처럼 달아지고 나는 온종일 그 달콤함을 음미한다. 성경의 말씀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예레미야 15장 16절을 예전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고통의 풀무 불 가운데 있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런 구절이 별 의미가 없었지만, 이제는 생명 같은 말씀이 되었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말씀이 된 것이다. 이처럼 그분은 내게 “흑암 중의 보화”(사 45:3)를 주신다. 나의 일상은 햇살을 잃어버린 날처럼 어둡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분이 비추는 한줄기의 빛이 그렇게 먹구름을 뚫고 내려오곤 한다.


불길을 통해 더욱 살아나다


인생에서 그렇게 빛을 보는 순간은 말로 충분히 표현하기가 힘들다. 시간이 거의 멎은 듯하다. 그렇게 되면, 다른 어떤 장소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더욱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젖어든다. 하지만 어쨌든 하루를 시작해야 하기에, 성경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나 일과를 준비한다.


그러나 옷을 입으며 이내 나는 그날 하루의 일과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한다. 인생의 부담이 나를 짓누르고 숨쉬기가 다시 어려워짐을 느낀다. 또한 미래는 어두움에 가려져 보이며, 머릿속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다. 두려움이 날 다시 사로잡는 순간이다. 그러다 보니, 단추도 잘 못 채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떻게 이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까?


이런 불안한 마음에 압도당할 때, 행동을 잠시 멈추고 기도한다. 그리고 평강을 구한다. 그러면 마치 풀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숨을 들이마시는 기분을 또 한 번 느낀다. 일종의 생존법인 셈이다. 그러고 나서 속삭인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그렇게 하고 나면, 비로소 요동치던 마음에 평강이 찾아든다. 성령님이 나를 평안케 하시며 내가 혼자 있지 않다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더 깊이 소통하게 되다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풀무 불은 더 뜨겁게 타오르고 정신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과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들은 전부 다, 나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그 풀무 불에서 고개를 내밀면 숨을 쉴 수 있다고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부르며 다시 한번 자유롭게 숨을 쉬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결국 그분과 하루 종일 소통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절망적이지 않을 때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풀무 불에 있다 보니, 이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해야만 숨을 깊이 들이쉬며 살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을 떠올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풀무 불의 열기는 견딜 수 없이 뜨거워진다.


하나님은 내가 불 가운데 지나도 타지 않고 또한 불꽃이 나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약속하셨다(사 43:2). 고난의 풀무 불을 만나기 전에는 그 약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알고 있다. 비록 나를 둘러싼 이 불이 날 집어삼킬 듯 숨통을 조이려 하지만, 내가 풀무 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그 불길은 힘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아예 이 풀무 불을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랬으면 알지 못했을 최고의 물과 음식 그리고 바람을 나는 지금 풀무 불에서 머리를 내밀어 맛보고 있다. 곧 생수의 강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요 7:39),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꿀로 배를 채우며(시 19:10), 하나님이 불어넣으시는 생기를 받아 영혼이 새로워짐을 느낀다(겔 37:5).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나다


풀무 불 속에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없는 숨은 보화가 있다.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고난으로 부르시거든, 놀라지 말라. 그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나게 하실 테니.”


오직 고난을 겪은 자만이 그 보화를 소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풀무 불을 겪은 자만이 생수를 마시고 꿀송이 같은 말씀을 맛보며, 그리스도를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비록 고난의 불이 말할 수 없이 뜨거울 순 있지만,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진리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다. 그 불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며, 나 자신이 순금 같이 빛나도록 고통을 사용하신다. 그래서 풀무 불의 중심부, 오늘도 내가 붙들고 씨름하는 이 고통의 한복판에서 진정으로 그분께 감사드리게 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Precious Furnace of Affliction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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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Vaneetha Rendall Risner

베니다 렌달 라이즈너는 자유 기고가이다. Desiring God과 Today’s Christian Woman의 정기 기고자이며, 'The Scars That Have Shaped Me'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