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미덕을 키우라
by Don Bailey2019-05-31

몇 년 전 원예학을 공부할 때, 잡초는 '달갑잖은 식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생각해 보라. 잡초도 다른 식물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잎사귀와 화려한 꽃을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식물이다. 그럼에도 잡초에게는 “달갑잖은”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왜 그럴까? 이는 잡초의 급속히 퍼진다는 특성 때문이다. 처음에 잡초는 정원 여기저기서 느긋이 자라난다. 그러다 잘 가꿔진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내가 다 점령해 버려야지”라고 마음먹은 듯 급속도로 영역을 넓힌다. 자만으로 가득 찬 잡초는 정원의 아름다움이 빛나지 못하도록 큰 혼란을 초래한다. 이처럼 이 식물에게는 무엇인가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다.

 

잡초의 지배적인 성향은 우리 안의 과한 욕구와 무척 닮아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열망이라는 감정을 심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서 그 열망을 잘 가꾸어 내면의 정원을 건강하게 만들도록 지음 받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에 대한 욕구를 주셨고, 이성을 갈망하는 마음도 주셨다. 이러한 본성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울타리 안에서 잘 관리하고 누릴 때 우리의 삶과 영혼을 이롭게 한다. 돈도 마찬가지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또한 내면에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우리가 위험한 상황으로 뛰어들지 않도록 그 행동을 조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욕구들이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 마치 잡초처럼 무성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스스로를 취하게 하는 알코올과 달콤한 디저트에 매번 마음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 또한 미모의 여성이 지나가면 보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에 따라 시선을 멈추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두려움과 불안이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당신의 영혼을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렇듯 절제가 부족할 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열망은 복이 아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잠언 25장 28절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말한다. 잠언의 지적처럼, 절제의 성벽 없이 살아가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충동적인 생각과 언어 그리고 행동은 아름답고 좋은 모든 것들을 점령하고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금욕하며 노력했던 이방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우리 크리스천들은 노력한다고 해서 스스로 영적인 경건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모든 충동과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절제는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성령의 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고 있을 때에도 계속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벧후 1:5-6) 더하라고 말이다. 베드로는 절제의 부족이 노동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열매의 풍성함 역시 무너뜨린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절제하지 못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성물을 탐하는 아간의 욕심을 생각해 보라. 그는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외투와 은 이백 세겔, 그리고 묵직한 금덩이를 탐냈다. 결국 그는 여호와의 명백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물질을 욕심껏 움켜잡았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온 가족에게 엄청난 손실과 상처를 입혔다.  

 

절제의 미덕은 사실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2012년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24가지의 역량 카드를 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차례로 나열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중 절제는 가장 마지막 자리인, 24위를 차지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인기있는 어느 대중 노래의 가사는 절제를 버리라고 외친다. “자제력은 필요 없어. 나의 절제를 가져가 [중략] 난 자제하고 싶은 의지도 없고 싸우고 싶지도 않아.” 간음이나 중독 혹은 분노 등 절제하지 못해 벌어지는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저항은 더 이상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이제 자기 중심성과 무절제, 그리고 나이키의 십삼 년 된 슬로건인 “일단 해 봐”의 정신을 권장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러한 자기 선호에 대한 욕구와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유혹이 속삭이는,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을 경계해야 하고 끊임없는 육적인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 절제가 나 자신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속이는 대적 마귀의 책략에 저항해야 한다(벧전 5:8).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이 단순히 우리가 타고난 신체적 조건 때문이거나 삶의 여건과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가 절제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욕구나 감정 때문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왜곡된 생각에 매이면, 우리는 영혼 속에 침입하는 죄악의 속삭임에 더욱 쉽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나와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벧전 1: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여, 욕망의 열매가 아닌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롬 8:13; 빌 1:11).


이와 더불어, 절제를 위해 싸울 때 큰 영적 전쟁이 일어남을 기억해야 한다. 스프로울 박사(Dr. R.C. Sproul)는 한 설교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담배에 대한 욕구를 끊으려 할 때 겪었던 갈등을 솔직히 묘사했다. 그는 흡연 욕구에 지지 않으려 담뱃갑 포장지에 예수님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욕구가 자신의 의지보다 훨씬 강할 때, 그는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 담뱃갑을 뒤로 돌려놓은 채 자신의 욕구를 따라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절제를 행하려는 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영적 유혹의 사이에서 심히 갈등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절제를 실천할 때, 나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고자 애쓰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자.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메시아께서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라고 예언한 것을 기억하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서고 싶은 유혹을 능히 거절하셨다(눅 9:51). 우리도 성령의 힘을 의지할 때, 유혹에 힘없이 희생되지 않고 부활의 승리를 기억하며 “넉넉히 이기[는]”(롬 8:37)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절제를 실천할 때, 잡초와 같은 끈질긴 욕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안한 삶으로 몰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젠가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나무 아래에서 영원히 밝게 빛날 것이다(계 22:1-3).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Cultivating Self-Control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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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 Bailey

돈 베일리는 플로리다주 샌포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부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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