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우리의 미약한 언어
by 전재훈2019-05-24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실 때(출6:3) 엘로힘이 아닌 ‘엘샤다이’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엘로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지만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이룰 능력이 완전한 자’라는 의미다. 바울은 전능의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엡1:11)로서 소개했다. 뜻을 정하기만 해도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아들의 생명을 걸었다면, 그 뜻은 결코 실수나 실패나 포기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5:8)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든, 원수이든, 혹은 연약하든 상관없이 완전하게 넘쳐 흐른다. 그 사랑에는 결코 실수나 실패나 포기가 없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는 자신의 환경이나 느낌, 혹은 판단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성경의 가장 핵심구절을 뽑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주저 없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뽑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성경의 첫 구절인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창 1:1)라는 말씀은 외우지 못할지라도 위의 말씀은 망설임 없이 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구절이다. 흔히 이 말씀을 ‘일삼이사’(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부르며 비밀번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토록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 말씀은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원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구절 속에 담긴 ‘독생자’라는 표현은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 예로 하나님은 아버지고 예수님이 아들이니, 성령님을 어머니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먼저 계셨고 지혜와 능력 역시 더 앞선 분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큰 신으로, 예수님은 작은 신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그 존재의 기원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결코 열등한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고,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분이 곧 하나님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는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는 유사본질이 아니라 ‘두 분이 같은 분’이라는 동일본질이다. 


두 분이 완전하게 같은 분이라면 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불렀을까? 조금은 외람된 표현이지만 ‘제 2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바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분이 쌍둥이라면 거룩한 형 ‘성형 하나님’과 거룩한 동생 ‘성제 예수님’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할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것도 인상 좋은 백인 할아버지 정도로 상상한다.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윌리엄 폴 영(William P. Young)의 소설 ‘오두막’은 하나님을 뚱뚱한 흑인 여성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남자거나 혹 최소한 어머니는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여러 부분에서 그분을 여성적인 언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엄마’로 부르지 않고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는 본능적 언어에 해당한다. 아이들은 누구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을 낳지 않았어도 자신을 돌봐주는 이를 ‘엄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빠’는 학습적 언어라서 누구를 ‘아빠’로 불러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아빠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분인지 배워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배워서 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배워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엄마’로 부르기보다 ‘아빠’로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왜 '독생자'라고 부를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일삼이사,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증거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관련을 가진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공자가 유교를 만들 때 ‘인(仁)’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인’은 ‘어질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씨’라는 의미도 가졌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씨’가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데에서 유교가 시작되었다. 결국 공자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파악했고, 국가를 통치할 이념 역시 이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효'라고 정의하여 ‘부자유친’의 정신을 강조했고, 이를 이웃으로 확장하여 ‘예의’를 만들고, 국가로 확장하여 ‘충성’의 개념을 확립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목숨일지라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을 정도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헌신은 ‘살신성인’ 혹은 ‘희생정신’이라고 표현하며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타인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는 아버지에게는 미쳤다고 비난할 망정 절대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들의 생명은 결코 내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 준다면, 그는 단단히 미쳤거나 혹은 상대를 미치도록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사실은 그분이 미치신 것이 아니라면 세상을 미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미치도록 사랑하신 그 ‘세상’이다. 


‘독생자’는 단순한 ‘아들’의 의미를 넘어선다. 아들보다 큰 개념이 장자(큰아들)이고, 그보다 큰 개념이 독자(외아들)이다. 그래서 과거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군대에 갈 때 ‘부친이 사망한 독자, 부모가 60세 이상인 독자, 2대 독자’는 방위병이 되었고, 3대 독자는 군 면제를 받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랑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담아 낼 수 있는 인간의 미약한 언어가 바로 ‘독생자’라는 표현인 것이다. 


나는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아빠다. 아들이 내게 유일한 자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 대신 죽을 수는 있어도 아들을 죽게 내어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 깊이와 높이는 끝이 없을 듯하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실 그 어떤 표현도 ‘독생자’라는 말보다 그분의 위대하고도 절절한 사랑을 더 근접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신다. 만약 이 사랑의 크기나 넓이를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 어떤 표현일지라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언어의 특성상 그 사랑을 표현할 가장 위대한 단어가 ‘독생자’이기에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하셨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믿는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벅차게 느꼈다고 할지라도 이는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한계 탓에 그 이상을 못 보는 것일 뿐,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훨씬 크고 견고하게 또 신실하게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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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