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진정한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들
by Joel R. Beeke2019-04-30

당신도 어쩌면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어봤을 것이다. “청교도는 누군가 행복해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처럼 현대인의 관점에서 청교도란 “흥을 깨는 사람들”, 또는 재미없고 “냉담한 신자들”로 여겨진다. 청교도와 관련된 표현에는 그런 선입견이 늘 따라다닌다.


 ‘청교도’(Puritan)라는 단어는 16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애초부터 비난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평범한 영국인의 관점에는 양 극단의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그 한쪽이 로마 가톨릭에 속한 ‘교황 예찬자’(Papist)였고, 다른 한쪽은 ‘정확성에 집착하는 사람’ 혹은 ‘엄격주의자’(Precisionist)로 여겨진 청교도였다. 즉 ‘청교도’라는 표현은 아주 세부적인 일에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며 또한 타인보다 자신이 순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는 물론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단어로 불리던 사람들은 순결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코 자신들을 순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죄악과 결함을 철저히 고백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한 삶을 실천했는데, 이를 청교도주의(Puritanism)라고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교리적으로 활력과 기쁨이 넘치는 칼빈주의를 지향했고, 경험적으로는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에서 얻는 따뜻함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 또한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역동적이고 신속하게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고, 교회에 모일 때는 언제나 삼위 하나님과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집중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진지하고 경건했지만, 사실은 매사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교도들이 누렸던 즐거움이 과연 무엇인지, 다섯 가지로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1. 거룩한 즐거움: 하나님을 경외하며 누린 행복


시편 128편의 주제는 그 내용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4). 여기서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진정으로 행복하여 내면에서 우러나는 기쁨, 즉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시편은 참된 즐거움의 토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있다는 가르침에서 더 나아가 그 즐거움이 창조 때부터 주어진 세 가지 사명을 통해서도 주어진다고 밝힌다. 그 사명이란 바로 노동과 결혼과 예배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즐거움이 매일의 일과 가정 생활과 예배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청교도들은 세 가지 요소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이룬다고 가르쳤다. 그 요소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인식, 하나님의 임재를 어디서나 지각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한결같은 책임 의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이다. 청교도들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죄는 불행을 가져다주고 내면에 있는 즐거움을 앗아간다면, 거룩한 경외심은 그 죄를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 노동의 즐거움: 일하면서 누린 행복


또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도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누리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다고 믿었다.


직업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에, 그 일을 통해 이루는 모든 성취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증거인 줄 알고 매사에 그분을 경외하며 즐거워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일함으로써 모든 과업을 성경이 가르치는 정직과 성실과 열심으로 감당하며 힘을 다해 목표를 이루어 간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혹 사르밧 과부의 경우처럼 양식이 줄어드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펴주시기를 바라며 그분을 신뢰한다.


인생에서 실망스러운 일을 경험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목적이 있음을 생각하며 그 상황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여긴다.


이 땅에서의 수고와 선행에 대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자비로운 상급이 있음을 생각하며 이를 영원히 즐거워하게 되리라는 확신 가운데 산다.


이처럼 세상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바라볼 때조차 청교도들은 풍부한 신학적 진리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


3. 가정의 즐거움: 가족과 함께하며 누린 행복


다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그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마찬가지로 청교도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가정 생활에는 즐거움이 쌓여간다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를 통해 얻는 즐거움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아내가 가져다주는 열매는 자녀만이 아니었다. 포도나무는 단지 포도만 맺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잎을 내고, 그늘을 만들 뿐 아니라, 주변을 아름답게 하고, 흙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도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인생에 베푸시는 많은 은혜를 가족들에게 보여 준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결실이 넘치는 삶을 상징하는데, 가족들은 이 포도나무를 통해 회복과 충전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는 남편에게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며, 남편은 그녀를 전심으로 신뢰하게 된다.


물론 청교도들의 결혼 생활에도 결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애쓴 그들의 성실함은 가정을 견고하게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이 정한 길을 걷는 자가 행복한 가정을 통해 복된 인생을 살게 되리라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4. 예배의 즐거움: 주일을 보내며 누린 행복


시편 128편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누리는 즐거움을 묘사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시 128:4-5).


청교도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복락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혼을 위한 잔칫날과 같았던 주일은 그들이 누리는 즐거운 삶의 중심에 있었다. 매주일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은 임마누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상쾌함을 수시로 누렸다. 이러한 체험은 기쁨의 눈물을 쏟게 만들며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이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평생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청교도들도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앙 생활을 했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방식은 그분 자신에 의해 제정된다는 원리를 믿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예배의 방식에서 그 무엇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예배의 규범을 확립해 갔다.


더 나아가 우리는 청교도들이 설교 한편 듣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여겼는지, 또한 그렇게 좋은 설교 듣기를 세상의 향락으로 날을 보내기보다 얼마나 더 만족스럽고 즐겁게 여겼는지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들이 듣던 설교는 보통 한 시간 이상씩 지속되었다. 케임브리지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가르친 로렌스 채더튼(Laurence Chaderton)은 언젠가 두 시간이나 쉬지 않고 설교를 지속하게 되자 회중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회중은 이렇게 소리쳤다. “제발, 멈추지 말고 계속 하세요!”


5. 미래의 즐거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 누린 행복


끝으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행복이 먼 미래에까지 펼쳐진다고 선포한다.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 128:6). 청교도들은 기쁨에 찬 언약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혜 언약(the covenant of grace)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 될 뿐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서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역과 전도의 핵심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신자란, 그 일생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God’s covenant faithfulness), 다시 말해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상은 바로 그들이 기록한 그 유명한 문서에 고스란히 반영되기에 이른다. “인간의 최고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진정한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들


이와 같이 청교도는 흥을 깨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비난자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즐거움을 정말로 알았던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자신과 노동과 가정과 예배와 주일을 통해 경험했을 뿐 아니라 다가오는 후손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될 그 알 수 없는 미래에까지 미친다고 여긴 즐거움의 비결은 다름 아닌, 그들의 경외심 곧 성령의 역사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참되고 진실하게 경외하는 저들의 마음에 있었다.


그 즐거움이 바로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라고 약속하신 그분 안에서 경험하는 삼위 하나님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기쁨을 알 수 없고, 오직 영원히 타오르는 불과 같은 하나님만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5 Reasons the Puritans Were So Joyful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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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el R. Beeke

조엘 비키는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교회사, 설교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Getting Back in the Race: The Cure for Backsliding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