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Donald Macleod2019-05-23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바로 이 시점 전까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서술은 오로지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채찍질, 가시관,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힌 뒤 6시간이 지났다. 조롱하는 군중들과 땅을 뒤덮기 시작한 어둠, 그리고 예수님의 길고 긴 침묵. 그런데 갑자기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고뇌에 찬 우리 구세주의 외침이 들려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씀은 시편 22편에서 가져온 아람어이다. 마태와 마가 모두 이방인 독자를 위해 이 구절의 의미를 번역해서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귀에 들렸던 그대로, 원문으로 전하고 싶어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시편을 호흡했고, 시편으로부터 가져온 말씀을 통해 몸이 아닌 영혼의 고뇌를 표현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예수님이 "죄인이라 낙인 찍히고 버림 받은 자의 울부짖음"을 자신의 영혼에 담았다(기독교 강요, 2권 16장 10절)고 기록했다. 이토록 거룩한 장면 속에서 우리가 보다 세심히 살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에도


앞서 언급한 기독교 강요의 구절에는 확실히 몇 가지 부정적인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버림 받다’와 같은 내용인데, 이 표현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영원한 교제가 깨어진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위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잠시도 멈추거나 분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장 큰 순종을 바치는 십자가 현장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또한 아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하심도 멈추지 않았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만 잠깐 내려오신 게 아니라 그와 함께 '머물기' 위해 내려오셨다(요 1:32). 또 성령님을 통해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도록(히9:14) '끝까지' 함께 하기 위해 내려오셨다. 


마지막으로 이 말은 절망의 외침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절망했다면 그건 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나, 고통이 약속을 가린 것처럼 보일 때에도 “나의 하나님”이었다. 예수님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고 계심을 확신했다.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진리는 예수님께도 진리였으며,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롬 4:18). 


정말로 버림받았다


앞서 언급한 내용이 모두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진짜로 버림받았다. 단지 버림받았다고 ‘느낀 게’ 아니라 정말 버림받았다.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예수님을 가룟 유다에게, 유대인에게, 빌라도에게, 더 나아가 마침내 십자가 위에까지 내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였다. 


예수님이 부르짖으실 때 하나님은 귀를 닫으셨다. 군중은 조롱을 멈추지 않았고 악마는 비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고통 또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분노를 입증할 뿐, 희망을 비추는 어떤 징조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시점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큰 사랑을 받는다는 하늘의 음성도 없었고,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비둘기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를 돕는 천사도 없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며 감사하는 죄인도 없었다. 


저주를 짊어지고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그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아람어로 부르짖었지만, 아람어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인 ‘아바’를 쓰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압도적이고 혼란스러운 고뇌 가운데 탄식하며 ‘아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막14:36).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바’를 부르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함께 올라갔던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바’는 거기에 없었다. 오로지 ‘엘(EL)’만이,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인 엘만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엘 앞에서 예수님은 사랑받는 아들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죄를 짊어진 존재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야 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분 앞에 선 그는 죄를 짊어진 존재였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죄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도, 별로 상관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죄인 중의 한 명이자 수많은 죄악으로 얼룩진 존재, 죄인 전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저주를 짊어지도록 정죄당했고 아무도 이를 가려 주지 않고 가릴 수도 없는, 죄 그 자체였다(고후 5:21). 아무도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의 대속물이 될 만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질 수 있었다. 엘은 몸값이 완전히 다 지불될 때까지 그를 살릴 수 없고, 살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몸값이 다 지불될 수 있을까? 혹 그가 실패하진 않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예수님이 짊어진 진짜 고통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가해진 고통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 예수님의 외침을 통해 이를 희미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공개적인 절규는 죄를 짊어진 아들과 하늘 아버지 사이의 긴장이 초래한 강렬하고도 개인적인 괴로움의 표현이었다. 세찬 죄악의 회오리바람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그 순간, 가장 끔찍하게 몰아쳤다. 


그가 겪은 영혼의 고뇌


그러나 예수님의 영혼에 가해진 고통의 무게만큼 무거운 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왜'냐고 물었을까? 부당한 고통을 받은 결백한 자의 항의일까? 맞다, 예수님은 결백하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들의 구속 제물이 되어 죽는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랬던 예수님이 갑자기 그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


또는 이해를 하지 못해서, 도대체 왜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왜'냐고 물었던 걸까? 혹시 그가 영원한 언약을 잊었던 건 아닐까? 인간의 마음을 가졌기에 변치 않는 마음을 품지 못한 채 주어진 모든 사실 앞에서 고통과 신성한 분노, 그리고 십자가라는 영원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놀라서 그런 것일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문 때문에 충격을 받았던 걸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았다(막 2:20).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로 그 고통의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했으며 두려워했다. 그렇게 막상 실제로 그 모든 괴로움을 맛보니 주어진 현실이 예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처절하기에 '왜'라고 물었던 것일까?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가 형벌의 현장에서는 온 인류의 죄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예수님은 저주의 끔찍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아바가 거기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바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심지어 자기 아들조차도 살리지 않는 온 세상의 심판관으로 그곳에 계셨다(롬 8:32). 


죄악의 잔을 다 마셨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은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다. 성경을 손에 든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은 채 끔찍한 지옥의 분노를 겪고 서 있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는 자리는 이전에도, 또 이후로도 그 누구도 설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무한한 공간의 아주 작은 지점, 영겁의 시간 중 아주 짧은 순간 속에서 모든 죄의 결과가 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저주를 견디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갑자기 끝이 났다. 희생은 끝났고, 커튼은 찢어졌으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단번에 열렸다. 이제 예수님은 시편 31편 5절의 말씀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시편 원문에 아바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예수님은 ‘아바’를 넣어 불렀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두 외침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안다. 예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다 마셨다는 사실, 그로 인해 인간을 향한 저주가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아버지가 마침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그 영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말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hy Have You Forsaken Me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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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ald Macleod

도날드 맥크라우드는 에딘버러에 위치한 Free Church of Scotland College에서 30년 넘게 조직신학 교수로 섬겼다. 대표 저서로 'The Person of Christ'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