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지 않으려면
by Marshall Segal2019-04-26

말 그대로, 하나님은 절대 책임을 진 존재니까 절대 비난의 대상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횃불을 켜기 위한 성냥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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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영원한 이별, 질병, 그리고 일과 사역-삶의 여기저기에서 절망할 때 어둠은 안개처럼 우리 삶에 스며든다.


우리는 주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의 눈은 삶의 어려움 속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의 빛의 단편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몇 주 또는 몇 년이나 계속될 수도 있는 절망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우리는, 수천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참을성을 가지고 어둠을 더 깊이 탐색하는 대신, 스스로 만든 횃불로 그 어둠을 밝히고 싶어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위험을 경고했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사 50:11). 하나님의 경고는 명확하다. 어둠이 닥쳤을 때 우리가 만든 횃불에 의지해서 걷는다면, 다름아닌 바로 그 횃불 때문에 우리가 타 죽을 것이다. 


내가 든 횃불


몇 년 전, 여러 해 동안 이겨내던 유혹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성적인 죄를 저질렀을 때 나는 실로 어두운 시절을 경험했다. 그 추락은 나로 하여금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했고, 그 전까지는 차마 상상도 못하던 절망에 빠지게 했다.(그러나 지금 보면 그건 은혜였다) 당시 괴로움은 나를 회개와 경각심, 그리고 순결함으로 이끄는 은혜가 되었지만, 그 시간은 쓰고 어두웠다. 내 죄성이 가져다준 쓴맛을 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그 죄성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얼굴까지도 보기 힘들었다. 


나는 절망감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관계가 치유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래 나의 모든 사역이 다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죄에 빠지면 어떡하지? 사탄은 바로 이럴 때에 온갖 잘못된 질문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두려움과 의구심의 바다 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지게 하려고 시도한다. 내 경우처럼 내가 자초한 어둠이든, 또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때문에 발생한 어둠이든, 우리에게 닥치는 어둠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고, 불이 꺼졌을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구세주이자 도움의 근원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만든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의존하는 대신,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어둠을 헤쳐나가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나 자신에게 어떤 약을 처방할 수 있을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방법, 다름 아니라 피상적인 즐거움에 빠지게 만들어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라는 실재를 아예 잊도록 하는 처방이 가능하다. 재미있는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쇼핑을 즐기는 등, 뭐가 되었든 단 몇 초라도 어둠을 잊게 하는 무언가에 빠지는 것이다. 고통을 되새기고 되새길 때에야 비로소 약간의 위안을 찾는, 자기 연민이라는 처방도 있다. 바벨탑을 짓는 대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은 협곡을 팔지도 모르겠다. 절망감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방법도 가능하다. 산산이 부서진 내 마음 속 유리 파편을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바꾸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고통받는 것을 볼 때 더 이상 외롭지는 않으니까,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소한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드는 이런 횃불은 자랑스러운 게 아니다. 이런 횃불은 나도 모르게 키우고 있는 우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우리가 시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준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과 허약한 우리의 실체를 보여줄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대로 그런 횃불에 의지한다면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횃불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런 횃불을 의지한다. 


황량한 인생


어둠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까? 인생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기 쉽다. 인생이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때는 기꺼이 하나님의 전능하고 전지한 품 안에 안긴다. 그러다가 인생이 다시 나쁜 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때 전능하던 능력과 지혜가 갑자기 위험하고, 무관심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권자니까, 비난을 받을 때에도 그에 걸맞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하나님은 절대 책임을 진 존재니까 절대 비난의 대상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횃불을 켜기 위한 성냥을 찾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불만을 품을 때, 불만과 불평 그리고 낙담에 빠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사 50:2). 내가 경고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너희를 오래 참지 않았느갸? 내가 너희를 부를 때 어디 있었느냐? 너희의 고통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소홀함 때문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 50:1). 인생이 황량한 것은 우리가 지은 죄의 어두움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인생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계획을 망치기를 원치 않으신다. 대신 우리가 그의 사랑에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 그 분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6-7).


그의 귀는 우리에게 닫혀있지 않다. 그의 마음은 우리에게 둔감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가까이 두길 거부한다. 우리 속의 죄성과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귀를 깨우치사


사람들이 주님의 초청과 경고에 귀를 막고 대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횃불을 높이 들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 중에서 들을 수 있는 자, 즉 약자를 돌보고 지키기 위한 애통함과 불의를 이겨낼 강인함을 가진 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한 귀를 막고 주님을 향한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담대하게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횃불에 불을 붙일 때, 이사야 선지자는 역청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귀가 생명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했다. 빛을 볼 수 없을 때 대신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사 50:5). 어두운 시간에 하나님은 그의 종의 귀를 열어주셨다. 그보다 훨씬 더 어두운 시간을 겪은 그리스도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일을 하셨다(요17:8). 만일 당신이 어둠의 시간 가운데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마 11:15).그는 당신의 마음의 귀를 이미 열어놓으셨다. 그의 목소리를 경멸하지 말라, 스스로 횃불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어둠이 닥친 이 특별한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으라(고후 6:7).


나의 횃불을 버리고


우리 자신이 만든 횃불을 의지해 걷는다면, 우리는 결국 그 불에 타고 말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절망의 어둠을 견딜 수 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귀를 기울여라. 의지하고 싶은 자신의 횃불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그의 목소리가 비추는 빛을 의지해서 걸으라. 오로지 말씀 속에서만 발견하는 바로 그 목소리 말이다. 회개하라, 믿으라, 그리고 다음 발걸음을 떼도록 하라.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건 그가 당신의 귀를 들을 수 있도록 깨웠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하셨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아무리 어두워도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어둠에 앉아 있을 때, 온갖 장애와 적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심지어 스스로 초래한 실패가 옥죌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바닥까지 떨어져서 절망감에 빠질 것 같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모든 빛이 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ow Not to Be Desperate

번역: 무제

어둠에 앉아 있을 때, 온갖 장애와 적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심지어 스스로 초래한 실패가 옥죌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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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