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화가 인류 역사상 다른 모든 문화와 다른 세 가지
by Gavin Ortlund2019-04-17

우리는 문화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교회사에 전례가 없던 수많은 변화들을 마주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웠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했으며, 루터는 자기 자신의 양심 문제를 가지고 분투했고, 츠빙글리는 무력 항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람이 스스로 자기 성(性)을 결정하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현대 문화가 역사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매우 희한한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이 우리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큰 그림 속에서 보는 것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성경이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라 명하시는 곳을 향해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우리의' 생각이라 말하는 이유는, 문화를 비평한다고 할 때 취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태도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가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바깥 풍경을 볼 때 통해서 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이 세대를 본받고”(롬 12:2) 있다. 


현대 문화의 특이점 세 가지


하나님, 윤리, 그리고 삶에 대해 우리 문화가 가진 본능들이 얼마나 특이한지를 세 가지 면에 걸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솔로몬, 예수, 바울과도 다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아즈텍 사람들, 훈족 아틸라와도 사뭇 다르다. 


1. 피고인석의 하나님


안셀름 (Anselm,1033–1109)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인데, 하나님의 자비라는 주제에 대해 안셀름이 얼마나 박식했는지 발견하면서 매번 놀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글들을 통해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를 간과하시고, 죽어 마땅한 이들을 살려주시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정반대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심판하시냐는 것이다. (팀 켈러가 자신의 책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에서 다루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이유 일곱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안셀름과 현대 문화가 서로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던지는 질문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내겐 놀랍다. 11세기를 살았던 수도사에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정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옛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다른 여러 신들에게 나아갈 때 피고인이 판사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그리했다. 현대인들에게는 그 역할이 정반대이다. 사람이 판사요 하나님은 피고인석에 앉으신다”라고 말하며 이 차이를 잘 설명했다. 


아마도 이 역할 변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무신론의 대두일 것이다. 무신론은 현대 서구사회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희귀한 현상이었다. 현대 사회 이전에 다양한 형태의 유물론과 불가지론이 등장하긴 했지만 언제나 극소수에 머물렀다. 인류사에서 어떤 시기이건 어떤 국가이건 간에 사제, 수도사, 이맘, 라마, 샤먼, 현자, 무당같은 이들이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위치했던 경우들이 넘쳐났다.    


2.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 표현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에서 외부 현실은 고정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그 현실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이었다. 석가모니와 플라톤도 이에 대해 생각을 같이 한다. 다만 어떻게 그 현실에 맞추어 가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이다.  


이에 반해 우리 문화는 사람의 욕망을 최대한 고양시켜, 외부 현실이 사람의 욕망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인생관이라 가르친다. C. S. 루이스의 말을 풀어서 표현하자면, 옛 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혼을 외부 현실에 어떻게 맞춰가야 하는가였고, 오늘날은 외부 현실을 어떻게 제압하여 사람의 욕구 앞에 굴복시키는가가 관건이다. 


후기 현대 서구 사회에서 진리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격하되었고,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신감도 상실했다. 그리하여 윤리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용인되었고, 성관계에 있어서도 서로가 '합의'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쉽게 말해 미국 문화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자아 표현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    


플라톤은 석가모니의 사성제(四聖諦)를 이해했을 것이고, 석가모니 역시 이성과 정의에 대한 플라톤의 옹호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둘이 현대인들의 주문인 “그냥 네 자신에게 충실해”라는 말을 들었다면, 함께 당황해하고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3. 초월에 굶주린 삶 


모든 고대 문화에서는 인생 그리고 의미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고대 몽고인, 마야인, 바이킹들에게는 인간 존재가 부조리하므로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같은 이들이 없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에 나온 리포 리피 (Lippo Lippi) 수사는 “이 세상은 오점도 공허도 아니라네 / 이 세상은 의미로 가득한 곳, 좋은 곳 /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내 빵이요 음료라네” 라는 말로 삶과 의미를 묘사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객관적인 의미를 상실했다. 우리는 초월, 공동체, 안정성에 굶주려 있다. 사람들은 삶을 바칠만큼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린 피곤하고, 표류하고 있고, 메말라 있다. 19세기에 신은 죽었노라 선언했던 니체의 고뇌를 생각해보라. 니체에 비해 덜 날카롭고, 덜 자각적일 뿐,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니체처럼 느끼고 있다.  


생활 수준은 높아졌지만 자살률도 높아졌다. 더 똑똑해졌으나 확신은 더 없어졌다. 재미있게 해주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성취감이 없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우리 문화의 성적인 혼란과 깨짐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깊은 실존적 공허때문이라 믿는다. 정체성이나 자아실현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성과 돈 같은 것을 통해 구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팀 켈러가 최근에 다루었듯, “고대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공동체 유지를 위해 성을 사용하고 돈을 벌었지만, 오늘날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아니면, 트레빈 왁스(Trevin Wax)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성에 탐닉하는 이유는 우리가 초월에 목말라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복음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타협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으면서 진리와 사랑으로 우리 문화에 참여해야 한다. 숨통을 조여오는 문화적 어두움 앞에서 그저 슬퍼하기만 하거나 신학이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들고 잘못된 점들을 볼 때마다 내리치는 식으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TGC의 사역을 위한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 for Ministry)에 나와 있듯이 “주류 문화의 가치에 그저 반대하는 것으로는 교회의 본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공공선을 위해 대항문화가 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적 변화들에 대해 반응할 때, 우리는 각각에 상응하는 체제 전복적인 성경적 원칙들을 확실히 세워두어야 한다. (1) 하나님을 향한 높은 식견, (2) 회개에 대한 철저한 이해, (3) 예배에 대한 초월적 비전. 


1.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온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읽어보면 기독교 영향이 있는 곳이든 없는 곳이든 어디에서든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아테네인들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포괄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해간다.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모든 호흡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는 초월자 하나님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2. 삶은 죽음으로 시작된다 


우리 문화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윤리 상황을 뒤집으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반스앤노블 같은 고급 서점가에 비치된 자기계발 서적들이 말하는 바가 아닌, 스크루지 영감이 겪은 일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을 더욱 잘 묘사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명하는 바로부터 멀어진 행위들을 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겉만 건드리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 기독교인의 삶의 온전한 기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열쇠는 회개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우리의 해석학적 논증이 갖는 설득력은 제한적일 뿐이다. 


3.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성적으로 무너진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는 단순히 성적인 문란함을 질타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 경험의 궁극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에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지 새로운 성관계 파트너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듣거나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관찰할 때,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이거야말로 내 인생을 바칠만큼 가치있는 일이야, 내가 지금까지 평생 찾아 헤매고 있던 것을 찾은 것 같아”라고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생각과 가치관들에 직접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우리가 저항하는 만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우리 문화에, 또한 우리 자신에게 분명하고 효력있게 전달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Ways Our Culture Is Different from Every Other Culture in History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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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avin Ortlund

게빈 오트런드는 First Baptist Church of Ojai(Ojai, California)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