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가 있는 곳에 사역의 기회도 있다
by Guy M. Richard2019-04-23

어떠한 이유로든지 반대에 봉착해 본 적이 있는가? 최근에 나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이를 싫어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갈등과 비평 또는 어떤 반대나 어려움이 있으면, 크리스천들은 그것이 교회를 떠나거나, 사역을 그만두거나, 직책을 내려 놓거나,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특정한 방식을 포기하라는 사인이라고 보는 경향이 상당히 많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이전보다 특히 이에 더 민감하다. 우리는 마치 목회를 평온하고 두 팔 벌려 환영받는 사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때로 반대에 봉착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한다.


그렇기에 고린도전서 16장 8-9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은 매우 도전이 된다. 그는 마게도냐와 고린도로 가기 한참 전 에베소에 머무르려 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에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9절)라고 언급한다. 바로 이 부분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바울은 ‘광대하고 유효한 사역’의 기회가 있는 곳을 ‘대적이 많은 곳’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목회 현장에서 마주하는 반대 세력의 존재에 대해 사역의 끝을 알리는 사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광대한’ 기회가 있는 곳에는 늘 반대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내가 그동안 삶과 목회 사역에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반대에 부딪힐 때, 나는 그것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사인으로 여겼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에 봉착했을 때, 혹은 반대 그 자체에 대해 쉽게 지금의 사역을 내려 놓으라는 신호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사고를 전환하여 바울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반대가 없다는 사실은 다른 사역을 시작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시점을 암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와 관련하여, 켐벨 모건(G. Campbell Morgan, [Martyn Lloyd-Jones]의 후계자)의 말이 생각난다. “섬기고 있는 곳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잘못된 곳에서 섬기고 있다.” 모건의 말은 반대가 없거나 반대가 실제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이는 사역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두 가지 모두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은 세상 속에서 어느 정도의 반대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편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고(요 16:8; 살전 1:5),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며(요 6:61, 66; 딤후 4:3),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에 반대 의견을 표할 것이다(요 8:37; 15:18-21). 이는 역사 속에서 가인과 아벨의 때 이래로 항상 존재한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목회 현장과 크리스천의 삶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반대가 있을 것임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은 복음에 충실한 목사라면 성경과 신학 및 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반대를 다루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신학생들이 목회 사역의 한 가운데에 늘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여러 형태의 반대를 미리 숙지하여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직언했다. 그의 말을 수용하여 갈등과 비평 및 곤경을 어떻게 다룰지를 훈련 받는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틀림없이 더 건강하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가 자신들이 처한 비난의 상황을 소명의 빛으로 해석하게 되고, 또 계속되는 반대에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면, 그 세대는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갖는다.


반대를 사역의 문이 닫힌 것으로 보는 것 못지 않게 위험한 생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가시적인 열매가 없음에 대해 목회지를 옮기라는 사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반대 의견의 존재와 축복의 부재 모두를 사역의 문이 닫힌 증거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주의해야 할 태도이다.

 

이사야의 사역을 보자. 이사야 6장 9-10절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라고 말한다. 이는 이사야의 사역은 완전히 반대자들로 구성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유대 백성에게 행한 그의 설교와 수고로부터 아무 가시적인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며, 오직 반대 세력만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매우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 “온 땅”이 그를 대항하여 싸우는 곳에서 사역을 할 것이고(렘 1:18-19), 아무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며, 저주와 조롱을 당하며(20:7; 15:10), 폭행과 감금을 당하며(37:15), 많은 이들이 그를 죽이려 들 것이라고 하셨다(26:8). 심지어 친한 친구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며 그와 그의 사역을 비난할 것임을 말씀하셨다(20:10).

  

하나님은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반대 세력들로 가득한 험한 곳으로 부르신다. 만약 지속적인 반대를 잘못된 사역 장소의 증거로 보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예들을 우리가 반대 세력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도망치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 예들은 비록 사역 현장에서 가시적 결실이나 축복의 사인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머무르게 하시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의도로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그러한 곳으로 부르셨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왜 이를 중지 혹은 이동의 암시로 쉽게 판단하는 것일까?

 

그러한 상황은 때때로 우리가 다른 것을 시작하거나 지속적인 반대를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님의 사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거기 머무르며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발하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답을 줄 수 없으나, 우리의 소명감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소명감의 렌즈를 통해 상황을 해석하기 보다는 아주 흔히 상황의 렌즈를 통해 소명감을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고는 한다. 나는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상황을 소명의 빛 속에서 해석하고, 지속적인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또 그 과정 속에서 다음 세대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When Opposition is a Good Thing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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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uy M. Richard

가이 리차드는 아틀란타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미시시피주 걸포트에 위치한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12년간 담임목사로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