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닮고 싶은 바울, 고난 중에 기뻐한 사람
by John Piper2019-04-01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받는 고난을 핑계 삼아 그분을 등진다거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가 받은 고난은 가볍지 않았고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고난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웠고 자주 찾아오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 11:24-25). 우리는 이렇게 반복되는 고난 중에도 어떻게 그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드린 사람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권능의 주님께 성실히 헌신하여 그 순종의 여정에서 반복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때 크리스천이라고 공언했으나 인생의 고난에 직면하여 쓰라린 아픔을 맛본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버린 이들이 있다.


누가 고난을 일으키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주신 것처럼 오해하며 신앙을 저버리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바울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고난에 관해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욥에게 일어난 고난이 어떠했는지를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욥의 이야기를 보면, 처음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며 비참한 상황을 조성해 내는 이는 사탄이다. 그는 욥의 자녀들을 죽이고 욥의 몸에서는 종기가 나도록 역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시험을 일으킨다(욥 1:6-19; 2:7). 그런데 욥 자신은 이 재앙 가운데 일어난 일들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그러면서 자녀들을 잃고 종기가 나게 된 상황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는다(욥 1:22; 2:10). 그리고 이야기의 종결부에 가서는 “[욥의 가족과 친구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한다(욥 42:11).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임의로 발생한다든가, 마귀가 홀로 결정해서 일으켜 낸다든가, 아니면 사람의 손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고난을 받게 되리라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이 그 모든 고난을 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행 9:16).


고난이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울의 자리에서 그처럼 지속적인 고난을 받게 된다면, 과연 그 느낌이 어떠할지 또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예수님, 보십시오. 저는 제 인생을 주님께 다 드리기로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전해 들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말씀이요(마 11:30). 또 내게 평강과 만족을 주신다고도 약속하셨죠(빌 4:7, 11-13). 그런데 거의 매번 주님을 세상에 증언하려고 할 때마다 무엇이 돌아왔는지 아시나요? 바로 고난입니다. 어떻게 주님처럼 강하고 온유한 리더로부터 이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종을 이렇게 대우하시리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인생이 계속 꼬이기보다 좀 쉽게 풀리도록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시면, 이제 제 신앙을 버릴까 합니다.”


사실 주님은 이와 같이 반응하는 피상적인 신자가 있으리라고 예언하셨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막 4:17).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장차 학대를 받게 되리라고도 경고하셨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눅 11:49). 주님은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 그에게 일생의 사명을 주실 때,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


따라서 바울이 예수님께 충성하다가 고난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자신이 속았다는 식으로 그분을 비난하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는 방식을 비판하거나 그 주권 속에 감춰진 지혜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분께 도움을 구했다. 물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고난에 대한 반응


언젠가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그 시간을 감당하기 매우 힘들어 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속한] 가시”(고후 12:7)라고 부르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8-9).


여기서 예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하신다. 만일 우리라면 그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렇게 말하겠는가? “주님의 능력이요? 그 능력이 제가 약할 때 온전해진다고요? 저는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영광을 드러내려 하십니까! 차라리 이 고통에서 나를 건지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삶에서 겪는 고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화를 낸다. 더 나아가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시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격분한다.


고난 가운데 발견한 기쁨


그러나 그런 분노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바울이 보인 반응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이런 기쁨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크게 기뻐하는가? 고통 가운데서 건져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고 거절당한 후에 하는 말이,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얼마나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 더욱 선명히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고난 중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라도 기뻐하겠다고 외친 것이다. 이 사람 바울, 내가 그를 존경하고 닮고 싶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ufferer I Want to Be: Why I Love the Apostle Paul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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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