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유
by Robert Godfrey2019-04-03
'생명'과 '자유'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생명을 옹호하고"(pro-life) 또 "자유를 옹호"(pro-liberty)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정의할 때는 주의가 필요한데, 이성뿐 아니라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 및 자유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가의 역할을 고려할 때, 이 두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생명'을 정의하는 데에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방법이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정의된다. 국가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에 손상을 주거나 앗아갈 수 있는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국민의 '삶'을 지킨다. 국가는 이를 위해 때로는 방어적인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이 모두가 다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가는 국민의 육체적 안녕을 보호하고 봉사하도록 경찰을 운영할 뿐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오염하는 물질까지도 규제한다. 그러나 이 '생명'이라는 단어가 종교적으로 정의될 때에는 좀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얼마든지 죽은 상태일 수 있다고 말한 바울처럼 말이다(딤전 5:6). 또 예수님은 어떠한가? 모세를 인용하면서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과 진정한 종교적 생명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마 4:4). 빵은 생물학적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수 있지만, 영적이고 종교적인 생명은 오로지 우리를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유지된다. 이런 종교적 의미까지 포괄한 생명을 지지하거나 보호하는 정부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명은 오로지 은혜를 통한 성령님의 축복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3 장에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자가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로마 황제였다. 로마 황제가 정한 법과 악은 모세의 율법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맥락에서 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공공을 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신체 또는 재산을 훼손하는 행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앙, 우상 숭배, 신성 모독, 탐심 등을 포함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의 '악'은 아니다. 로마 황제는 그런 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 황제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라고 했다(롬 13:4). 국가는 생물학적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과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삶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이 살아가는 데 있어 정부가 생물학적 삶을 증진하고 보호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비록 증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적인 삶을 허용할 것도 기대해 본다.

'자유'라는 말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말해서, 최상의 자유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건 또 다른 얽매임을 의미하는데, 바로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한편 정치적인 자유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 나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책임을 갖고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가 타인과 타인의 자유 또는 재산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제재를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자유는 내가 짓는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죄를 지을 정치적 '권리'까지 포함한다. 침례교 친구들은 내가 아기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을 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말해서, 양심을 걸고 그 문제를 놓고 깊은 연구까지 했던 성직자로서 나는 침례 의식을 행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다. 침례는 침례를 받는 아이 또는 그 부모에게 아무런 정치적 해를 끼치지 않는다. 침례는 다른 사람의 건강, 재산 또는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침례교 형제들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를 변호하며 그들 또한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필요한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 또한 내게 동일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듯이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적절하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또는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자유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 즉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이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감동되어 절로 우러나오는, 자유롭게 터져나오기를 바라신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바울의 관심은 사랑이 올바른 동기에서 나오는가, 그래서 그 사랑이 신실하고 양심적인가의 여부였다.

바울은 교회에 닥친 기근 구제라는 냉엄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다룰 때조차도 행동 그 자체와 더불어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기부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행위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가장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자유는 종교적 신실함을 지키려는 우리의 관심과도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문화적 유익 때문에 자유를 옹호한다. 문화는 사람들의 재능, 통찰, 그리고 각종 공헌이 모여 만들어진다. 만약에 재능과 공헌을 억누르는 정치적 환경이라면, 사람들은 재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를 찾을 것이다. 퀴리 부인(Marie Curie)은 고국 폴란드에서 방사능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었기에 파리로 올 수밖에 없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는 자신의 첼로 경력 대부분을 고국 러시아 밖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보냈고, 소련이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야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932년 고국 독일을 떠났다. 자유로운 문화였다면, 이 사람들이 고국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이들의 고국은 그들의 기여를 압수해 버린 셈이다. 버지니아 장로교인들은 18세기 후반 이미 정부와 자유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776년 10월 24일 하노버 장로회가 버지니아 주의회에 종교 자유를 위해 제출한 탄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는 종교 시설이 공동체의 일시적인 이익에 매우 해롭다는 사실을 천명할 것을 간청하며 [중략] 그런 시설은 인구를 크게 줄이고 결과적으로 예술, 과학 및 제조업의 발전을 현저히 저해하기에"(역주: 하노버 장로회가 제출한 탄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교와 정부의 역할 분리에 대한 심도 있는 내용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정부가 교회를 도우려 하면 오히려 해롭다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에 인용된 내용은 타락한 성직자 봉급을 포함해서 필요 이상으로 교회 운영에 돈이 많은 들어가는 데도 주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주정부가 적극적으로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버지니아 주가 다른 주에 비해 뒤떨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한 탄원으로 이해된다).

자유와 소위 말하는 '문화 전쟁'

'문화 전쟁'은 필요 없다.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과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힘을 합쳐 미국이라는 공화국을 설립한 이후, 세속적 세력과 종교적 세력은 항상 함께 노력해 왔다.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의 정확한 차이가 반드시 경쟁 또는 ‘전쟁’일 필요는 없다. 신정 국가를 추구했던 이슬람교나 중세 기독교, 또는 나라 차원에서 세속주의를 강요하는 프랑스(무슬림은 학교에서 히잡을 착용할 수 없다)와 달리, 미국은 그 중간을 선택했다. 미국이라는 공화국에서는 (세속국가인 프랑스와 달리) 정부가 종교를 보호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교나 중세 가톨릭과는 달리) 정부가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평상시 시민 사회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살인과 야만 행위까지도 전쟁 중에는 허용된다. 그러므로 '전쟁'이란 의미는 총체적 갈등, 더 이상의 규제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속적이든 아니면 종교적 두려움 때문이든, "지금 우리의 문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라고 설득된다면, 문명 보존이라는 절대 목표를 가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웬만한 구속과 인간됨은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문명을 위해 문명의 가장 기본인 정중함, 예의가 희생된다.

왜 우리는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또 승리해서도 안 되는가

기독교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첫째, 행여 과반수를 얻어 강제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이긴 게 아니라 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일말의 기회조차 앗아간 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또는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겉으로만 기독교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회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이고,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문화조차 사라지게 된다.

둘째, 영향력을 끼치는 도구로 강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발전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도구를 상실하게 된다. 도덕적 설득과 (당신의 선행을 볼 수 있는) 모범이다. 강압에 의존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설득과 모범에서 실패한다. 강압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사도들이 사용하기를 거부한, 바로 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고후 10:4). 따라서 소위 말하는 문화 전쟁에서 질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기는 커녕, 그들이 우리를 회심시킨 꼴이 된다.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도구였던 전체주의와 강요를 사용하며 양심적 신앙과 순종을 버리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제: Life and Liberty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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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obert Godfrey

로버트 갓프레이는 Ligonier Ministries의 회장이며, 캘리포니아 Westminster Seminary에서 명예교수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대표 저서로 'God’s Pattern for Creation, Reformation Sketche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