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행복의 추구
by Ken Myers2019-03-19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행복할 권리이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인간의 이러한 기본권을 묘사하기 위하여,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행복 추구'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와 그 이전부터,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하는 기본 권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성경의 저자들처럼 행복을 어떤 느낌이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 현실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회자되는 말처럼 “당신이 행복하다면”이라는 어구는 히브리인, 헬라인, 크리스천 모두에게 용납되지 않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도덕적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축복’이라는 성경적 개념과 유사한 단어이다. 중세의 기독교 윤리에서, 행복은 진정한 선에 버금가는 번영이나 안녕의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며, 욕망과 야망도 이를 벗어나지 않아야 했다. 따라서 행복은 윤리적인 과제이지 심리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행복은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욕망과 행동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이 말은 인간이 본능적으로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지 않으려 하거나, 어떤 매혹적인 쾌락에 의해 본성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의 추구라는 개념은 하나님 형상을 소유한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죄와 어리석은 행동이 순종이라는 인간의 참 정체성을 잃게 했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오직 은혜로만 가능해졌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의 무질서함에 저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참된 행복의 추구는 성화와 관련이 있다. 즉 참된 행복의 추구는 우리가 거룩한 순종을 하도록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대부분의 현대인들, 아마도 크리스천들조차도 쉽게 따르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반기독교적 행복의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반기독교적인 행복의 추구에 이토록 영향을 받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일어난 윤리 사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일부분 기인한다. 그때는 철학자들이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시기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은 죄의 개념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알레스데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에 따르자면,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을 근거로 하여 모든 학문을 이해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 궁극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여겼고, 국가 철학은 개인의 생각이나 도덕성에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MacIntyre, After Virtue, 62).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받아 행복의 추구라는 말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행복은 주관적 즐거움이자 개인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행복의 추구라는 개념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고, 단지 정서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얻기 위한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나 지속적인 재미의 추구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윤리나 삶의 질서와도 연결짓지 않았다. 실제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간통죄를 저지르거나, 부모를 모욕하거나, 낙태를 행하거나,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등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선택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행복을 단순히 기분 좋은 주관적인 상태로 간주하면, 인류에게 정해진 기본적인 삶의 질서들은 그렇게 무너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20세기에는 대중 매체의 증가와 다양한 오락 거리들이 더해져서, 행복의 추구를 재미를 지향하는 식으로 여기는 풍조가 더욱 강화되었다. 1950년대 중반, 심리학자 마사 울펜슈타인(Martha Wolfenstein)은 ‘재미 도덕성’이라 부른 윤리의 등장을 주목했다. 지금까지의 도덕성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질서와 목적에 부합했다면, '재미 도덕성'이라는 윤리는 행복에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재미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녀가 주목한 측면은 다음과 같은 윤리의 등장이었다.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다들 재미를 추구하는데 혼자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중략] 전통적으로 금지된 것들에서 만족을 느끼는 일은 죄책감을 일으키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행복은 개인적인 쾌락과 완전히 동일시되었을 뿐 아니라, 예전에는 행복의 근원이라고 여겨졌던 즐거움들이 점점 더 사소하고 덧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재미를 추구하는 일로 인해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문학을 좋아하거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은 더 섬세하고 노력이 요구되는 즐거움은 경시되는 반면, 신경을 자극하는 순간적인 오락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즉각적 소비의 유형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우세해질수록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는 ‘공허의 추구’라는 최근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작(항우울제)을 사용해 본 사람들 중에서 이 약이 그들을 실제로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우울제는 오히려 그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그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다시 밀어냈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자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발로우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관찰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로 장을 보는 ‘중산층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11개월 후, 그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매우 잘 단장한”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서 미소 지은 얼굴을 겨우 일곱 차례 보았는데, 그중 세 명의 미소는 거짓된 미소로 판정되었다. 슈퍼마켓과 그밖의 장소에서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표정은 거의 “자신에게 몰두된 괴로운 얼굴”이었다. 창조자가 우리 본성에 심어 주신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피곤함과 실망을 느끼게 된다.


‘더 좋은 기분’(Better than Well)이라는 책을 집필한 칼 엘리엇(Carl Elliott)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다양한 ‘강화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엘리엇은 현대 사회에서 행복의 추구라는 과제는 매우 절박한 나머지 “그것을 공격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를 다시 억눌러서 무의식 속에 집어 넣는 일”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붙잡고자 여러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마약을 먹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돈을 소비하거나, 나쁜 관계에 빠져 너무나도 긴 시간을 낭비한다.


이러한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행복의 추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엘리엇 외에도 여럿 있다. 올해 초에 발간되 에릭 윌슨(Eric Wilson)의 성명서, ‘행복에 반하여: 우울을 찬양하며’(Against Happiness: In Praise of Melancholy)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았다. 윌슨은 삶에서 비극이 찾아오면 그냥 슬퍼하는 것이 때로 우리를 정서적으로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늘 낙관적으로 행동하려는 태도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행복의 추구에 대한 풍성한 비전을 회복하는 일은 크리스천들에게 고유하게 남겨진 과제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기뻐하며, 우리가 피조물로서 그분의 방식대로 살아갈 때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죄로 인한 무질서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때까지 진정한 축복은 종종 고통과 박해 및 희생을 포함한다. 행복은 우리가 누릴 권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미있느냐?”라고 결코 묻지 않으셨다. 오히려 신실한 종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한다고 가르치셨다.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아갈 때 얻게 되는 결과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라고 약속하셨다. 단순한 재미를 따르지 않고 신실하게 순종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Pursuit of Happiness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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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en Myers

켄 마이어스는 1992년에 Mars Hill Audio Journal을 시작한 이래 계속 진행자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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