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의 소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2019-02-18

누군가를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탈진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진심 어린 긍휼은 이내 바닥을 보이고 만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돕다가 결국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긍휼의 소진 (Compassion Burnout)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 상담가, 교회 리더가 어떻게 탈진에 이르는지를 알고 있다. 이미 주변에서 목격했거나 스스로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역자는 대개 높은 이상, 폭넓은 훈련, 긍휼이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사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긴 근무 시간을 버티고 감사하다는 반응도 얻지 못한 채 부족한 사례를 수령하면서 여러 해를 보내고 나면,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일에 대한 동기도 사라지고 긍정적인 결과도 보지 못하면, 이내 좌절이 찾아오고 좌절은 곧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타인을 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네 단계로 진행되는 탈진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바로 열정, 침체, 좌절, 무관심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목회 사역을 하며 그 네 단계를 하루만에 다 겪은 적도 있다. 아침 7시에 사역을 시작할 때는 긍휼로 충만했다가, 점심 때가 되면 지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가며, 오후 회의 시간에는 좌절을 경험하다가, 집에 오면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만다.


‘각성’(disillusionment)은 탈진을 묘사하는 임상 용어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사역을 하겠다는 비전을 갖지만, 그것이 실현되기도 전에 각성에 이른다. 그 비전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사역의 갱신을 위한 깊고 신선한 자원이 다름 아닌 오래된—그러나 과소평가되어 온—기독교의 한 가르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란 곧 타인을 위한 긍휼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맛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긍휼은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구원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수행하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역의 필수 덕목이기 때문이다.


긍휼을 찾아서


그렇다면, 긍휼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쓰는 ‘긍휼’(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파티’(pati)와 ‘쿰’(c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두 단어가 결합되면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긍휼’(Compassion: A Reflection on the Christian Life)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긍휼은 우리에게 아픔이 있는 곳으로 가, 고통의 장소로 들어가서, 단절과 두려움과 혼란과 고뇌를 나누라고 요청한다. 긍휼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신음하도록, 외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외로워하도록, 우는 사람과 함께 울도록 도전한다. 긍휼은 약한 자와 함께 약해지도록, 상처에 노출된 사람과 함께 상처에 노출되도록, 힘이 없는 사람과 함께 힘이 없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인간다운 상태에 처하도록 만든다.”


긍휼은 흔히 접하는 단어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목이며, 사역을 위한 메타포가 된다.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이렇게 설명했다.


“긍휼을 목회 사역의 핵심으로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긍휼은 누군가를 돌보는 사역을 구체화한다. 이때 긍휼은 그 사역의 근거를 하나님의 존재에 깊이 두어,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으로 가지고 타인을 돌보게 한다.”


우리는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일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긍휼을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긍휼의 소진을 경험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유한하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긍휼은 감소하는 자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으로 시선을 돌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만이 무한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긍휼의 주님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긍휼’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50회에서 80회 가량 사용되었다.


역사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차원의 긍휼이 자주 묘사된다(왕하 13:23). 시편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아버지와 같은 긍휼을 품으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한다(시편 103편). 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을 약속한다(사 54:7).


또한 복음서로 가면, 긍휼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긍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돌아보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마 9:36; 14:14; 15:32). 그분의 치유 사역은 망가지고 약하고 빈궁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긍휼로부터 흘러나온다(마 20:34).


예수님이 하신 비유들 중에 가장 사랑받는 두 가지 비유가 바로 긍휼과 깊이 관련된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긍휼을 갖고 행동하기를 권면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3). 또한 탕자는 긍휼로 충만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끝으로 서신서들은 주님의 긍휼에 거듭 호소하고(롬 9:15; 고후 1:3; 약 5:11),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교훈한다(엡 4:32; 빌 2:1; 골 3:12; 벧전 3:8).


결국 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을 거쳐 그리스도와 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인내와 사랑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분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소진되는 우리의 긍휼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다.


1. 천천히 가라


긍휼은 효율성이 낮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는 일에는 더 느린 걸음과 배려, 여유가 요구된다.


서두르는 자세는 사역에서 탈진하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서두르는 일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 개척의 과정에서 열 가지 약속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였다. 긍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가 세우는 계획의 방향을 재설정하셔야 하고, 우리 자신이 원하는 스케줄을 내려놓고,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의 제안과 필요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긍휼의 샘을 채우라


예술가와 작가들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한 창의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심상, 경험, 독서로 상상력의 ‘샘을 채워 놓으라’는 권면을 듣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긍휼의 사역자는 긍휼의 샘에 매일같이 찾아가 모든 긍휼의 주인 되시는 그분으로부터 신선한 자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꾸준한 성경 읽기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긍휼의 샘을 채워 놓을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내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롭게 하시는 긍휼의 주님을 만난다. 따라서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분 앞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도움을 구하며 어려운 순간에도 평화를 찾을 수 있다.


3.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하라


우리는 지치게 되면, 지식(우리가 아는 것)이나, 능력(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나, 평판(다른 사람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건강한 사역의 규범은 ‘안으로부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 받은 정체성을 가지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의 긍휼은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긍휼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한다고 말이다.


안으로부터 타인을 지도하는 일은 수시로 우리 자신의 깊은 생각과 감정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타인과 나누며, 내게 허락된 이들의 마음을 격려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럴 때 우리는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바꾸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기를 원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긍휼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긍휼을 받는 ‘내면’의 수용을 포함하고, 나아가 긍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외면’의 섬김도 포함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긍휼로 충만할 때, 나아가서 그 긍휼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퍼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긍휼은 예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빈궁한 세상을 향한 자신의 긍휼을 확장해 가신다. 즉 우리는 그분의 긍휼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유한하고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긍휼의 소진은 사역에서의 실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리게 가고, 긍휼의 샘을 채우며,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결국 긍휼로 충만한 인생을 위한 지속적인 갱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Burnout Is Coming-Here’s How to Prevent It

번역: 하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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