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그 날'
by R. Carlton Wynne2019-02-1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요일 3:20). 하나님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만사를 철저하게, 영원히, 변함 없이 아신다. 그분은 자신의 완전하심과 계획과 행동과 목표를 아신다(시 147:5; 사 46:10; 행 15:18). 그분은 빛 가운데 있는 수많은 천사들을 아시고(단 7:10), 지옥의 구석구석뿐 아니라(잠 15:11) 우리의 죄악(시 69:5)과 감춰진 생각(시 139:2), 그리고 모든 고통의 무게까지도(시 56:8) 아신다. 아주 작고 세밀한 대상부터(마 10:29–30) 우리를 구원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롬 8:29; 딤후 1:9),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과 우연한 사건들을 포함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오류없이 알고 계심으로써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신다(삼상 23:10-13; 마 11:21). 그리고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속성을 지닌 신성을 충만하게 지니고 계신다(빌 2:6; 요 21:1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적 지식과 마태복음 24장 36절의 내용을 양립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막 13:32).

과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무엇을 모르셨을까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두 가지 ‘심판’에 대해 예언하셨다고 설명한다. 한 가지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에 임한 심판이고(마 23:38; 26:61),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임하는 심판이다(마 24:3, 14, 23–27). 학자들은 어느 구절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 두 심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 날과 그 때”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예수님 자신이 돌아오실 때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동의한다(마 25:31–34).

바로 여기서 궁금증이 발생한다. 어떻게 세상의 심판을 집행할 그분께서 그 날이 언제인지를 모르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는 우리만 느끼는 어려움이 아닌 듯하다. 아마도 교리적 난제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몇몇 신약성경 사본에서는 “아들도 모르고”라는 표현을 생략해 놓았다. 물론 그러한 교정이 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분명 그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부가 아는 것은 곧 성자가 아는 것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단일한 존재와 생각과 의지를 소유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세 위격(the three persons)이 이루는 관계는 그 안에서 한 위격이 다른 위격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한 위격이 아는 것은 다른 두 위격들도 철저히 영원하게 알고 계시다. 서로 구별되어 상호 교통하는 위격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36절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신 예수님이 어떤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계시다거나 그런 상태에 계셔 온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의 정통적인 교리와 성경 전체에 기록된 계시는 그러한 개념을 배제한다. 무한하며 불변하는 지혜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어떤 내용을 배우지 않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성부와 성령만이 아니라 성자에게도 해당된다.

지식이 자라신 예수님

그런데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삼위일체의 제2위격(로고스)이신 그분은 2천 년 전에 놀라운 은혜 가운데 변할 수 있는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웨스트민스터 대요리 37문답)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 따라서 그로부터 영원히,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연합을 이루었다. 인간으로서 성자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눅 2:52) 가셨다. 그리고 타락 후 인간이 경험하게 된 바와 같이 허기지고(마 4:2), 피곤하며(요 4:6), 고통을 느끼실 뿐 아니라(마 26:38),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놀라기도 하셨다(마 8:10; 막 6:6; 눅 2:46; 7:9). 예수님은 이러한 변화들을 오직 그분의 인성으로만 경험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예수님의 신성에는 어떤 제약이나 변화가 있을 수 없지만, 그분의 인성에는 실제적인 제한과 시간에 따른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입술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혹여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언급하신 “아들”이라는 표현이 ‘인자’(the Son of Man)가 아니라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을 짧게 줄인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위에서 내가 제시한 견해에 상반되는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성경은 때때로 성자를 그분의 신성에 따라 소개함과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분의 위격이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행 20:28; 고전 2:8). 따라서 제한된 지식(곧 인간의 속성)은 그러한 지식이 인간으로서 중보자가 되신 분의 위격에 속하는 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은 채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주의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단언할 때조차(요21:17), 그분은 자신이 재림하실 날을 모르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일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신학적 난제를 주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대해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돌아오는 날을 모르실 수 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이다.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4장의 문맥은 36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언이 우리의 헛된 호기심을 저지시키고 그분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 마침내 그분과 대면하기를 갈망하는 열정과 경각심을 갖도록 고무시키는 데 그 의도가 있음을 보여준다(마 24:42, 44; 25:13, 46).

만일 하나님과 가깝고(히 12:22; 계 3:5) 힘과 지혜에서 사람을 능가하는(삼하 14:17, 20) 천사들도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그 때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얼마나 더 그분을 신뢰해야 하겠는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완성의 때를 알지 못한 채 당신의 승귀를 바라보며 십자가로 나아갔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광스러운 본향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양한 고난의 정도와 기간을 우리는 얼마나 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래로 매일 매일이 우리가 기다려오던 바로 그 주님이 오시는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즐겁게 하루 하루를 맞이 해야만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내용을 말해 준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빛 가운데, 영광과 능력으로, 홀연히 오시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임하시며, 세상의 마지막 때에, 천사들과 성도들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그분 앞에서 울게 될 것이다. 어디에서 그리고 특별히 언제 이런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부와 성령과 승천하신 성자, 바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우리의 구원자(마 28:18) 외에는 누구도 그 날을 알지 못한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원제: One Thing Jesus Didn’t Know
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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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 Carlton Wynne

칼튼 윈은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부교수이다. 그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로 섬겼다. 데릭 토마스와 함께 'Zeal for Godliness'를 공동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