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장례식
by Harry Reeder2019-01-23

이 글의 주제는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두려워했던 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목사로서 장례식을 인도하는 사역을 나는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사역을 가장 큰 특권으로 여긴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승리의 부활이 지닌 역사성, 그리고 그 모든 사건에서 울려 퍼지는 영광스러운 메시지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인이 된 성도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하고 비신자 조문객들에게 은혜의 구원을 제시하면서, 신자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위엄과 복음의 영광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러나 비신자의 장례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행사 또한 복음을 적절하게, 진실하게, 그러면서도 열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나는 비신자의 장례식 때 효과적인 복음을 전할 문이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는지를 보면서 끊임없이 놀란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누군가를 천국에 보내거나 거짓된 확신을 줄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의 관심을 영원한 실재로, 그리고 구주의 필요성으로 조심스럽게 돌리게 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비신자의 장례식에 수반되는 과제를 생각해보자. 먼저, 비신자의 장례식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당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 동정심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복음에 대하여 사려 깊게 또한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분명히 접하게 될 것이다. 비신자의 영원한 상태는 복음의 진리에 의해 드러난다. 좀 더 명확히 말해보자. 우리는 한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분명한 선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도 거짓된 확신을 주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고 또한 그의 영원한 목적지에 대해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전에 믿음이 없던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회심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를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며,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빛 가운데 계신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비신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오’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죽기 직전까지 믿지 않았는지 그 여부는 정확하게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사람의 마음 상태와 그의 영원한 목적지를 밝히 드러낼 능력을 가지셨고, 그렇게 할 위치에 계신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설교자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감상적이고 진부한 표현으로 시작해야 하는 장례식 예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서도, 목사는 여느 설교와 마찬가지로 설교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엡 4:15). 어느 청교도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사랑 없는 진리는 야만적이고, 진리 없는 사랑은 잔인하다.” 이 경우에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제안을 하자면 이렇다. 고인을 잘 알고 그의 기독교 신앙과 그의 일생 동안의 공헌을 증언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간략한 추도사를 부탁하게 하라. 적절한 추도사가 끝나면, 설교자는 복음에,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소개하는 영광스러운 죄 사함의 진리에 부담 없이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를 통해 설교자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물론 설교에서 사적인 언급도 필요하고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참되고 오래 지속되는 위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복음의 약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본향’에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제기할 질문은 ‘여러분은 어디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이다. 또 하나의 실천적인 제안이 있다. 나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생전에 보던 성경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성경을 찾고, 거기에 있는 메모들을 확인하고, 그가 밑줄을 그었거나 자신의 생각을 쓴 곳을 살펴보기를 즐긴다. 나는 장례식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고인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하관예배를 축도로 끝낸 다음에, 나는 항상 그 성경을 고인의 배우자나 가장 가까운 친척의 손에 들려주면서, 개인적인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넨다.


우리의 구속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부활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지닌 복음의 진리를 단순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참석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패러다임 전환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 설교자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당신의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인이 된 그 사람이 ‘산 자의 땅’에서 ‘죽은 자의 땅’으로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이와 반대의 내용이 사실임을 선포해야 한다. 그들은 ‘산 자의 땅’을 떠나 ‘죽은 자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땅’을 떠나 ‘산 자의 땅’으로 갔다. D. L. 무디(Moody)는 복음의 진리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뉴욕의 저널리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 당신은 신문에서 이스트 노스필드의 D. 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을 것입니다.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의 저는 지금의 저보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Pastor and the Funeral

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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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arry Reeder

해리 리더는 앨러배마주 버밍햄에 위치한 Briarwood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미국 TGC의 이사이다. 대표 저서로 The Leadership Dynamic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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