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
by Stephen Witmer2019-01-21

작은 방에 가득한 긴장감을 의식하면서, 나는 불편한 듯 의자에서 자세를 바꿨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 목회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만족에 관한 대화가 곧 오갈 것임을 짐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혹 그들이 상처가 될 말을 하며 교회를 떠나는 불행한 결말이 연출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할 때, 나는 하나님의 역할에 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중히 여겨야 할 교리


그 후로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이 교리를 통해 힘을 얻고 격려를 받았다. 나는 섭리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칼빈은 이 교리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섭리에 관한 무지는 최고로 비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최상의 복은 섭리를 아는 지식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개혁주의 견해를 옹호한다 하더라도, 이 교리를 통해 “최상의 달콤한 열매”를 거둔다거나 “이 교리를 아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라고 말할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칼빈의 글을 읽으며, 이 중요한 교리의 실제적인 유익을 경험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차원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견해는 인간의 사고, 선택, 행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는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그의 아버지의 손에 의해 발생한다”라고 선언한다.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견해는 인간이 야기하는 원인도 고려하여 신적(神的) 요인과 인적(人的)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인적 요인과 구별되면서도 바로 그 인적 요인을 지배하는 신적 요인 안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견해는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창세기 45장 본문에서 확인된다. 창세기 45장 4-8절에서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았다고 두 번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세 번 언급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 교리가 적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특징이 있다. 요셉은 형제들의 역할을 두 번 언급하고 나서, 그 역할을 부인하는 것처럼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여기서 요셉이 일부러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말은 분명히 이 문제에 관한 ‘궁극적인’ 책임이 형제들에게 있지 않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과 하나님은 모두 어떤 역할을 실제로 했지만,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의 선택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섭리 건망증


이 말은 요셉이 관념적으로 부적절하게 판단하고 내뱉은 신학적인 언급이 아니다. 실제로 여기에는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함의가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창 45:5)라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의 행위는 요셉의 형제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렇다. 형제들은 진정으로 죄를 범했고, 이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형제들의 행동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고, 이 목적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쳐야 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그들의 죄악된 의도가 아닌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더 집중하라고 촉구한다. 이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고(창 45:9), 그 결과로 하나님이 가족 전체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보고해야 했다(창 45:10-11). 나중에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원인 때문에, 요셉이 복수하려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창 50:19-21).


칼빈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받을 때,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고통은 증가되고 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눈을 들어 원수가 악하게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에 의해 허용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마치 창세기 45장의 요셉처럼) 여기서 칼빈은 과장법을 사용해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타인의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 또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독교인의 마음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는 점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납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물의 제1원인으로 바라보고 제2원인들은 그 본연의 맥락 안에서 주목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동일하게 악한 행동을 두고서도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드러나는 방식대로 양자를 명확하게 고찰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눈을 들라”는 칼빈의 권고는 우리의 주된 초점이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그의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매우 유익하고 실제적인 권고이다. 우리는 심술궂고 악의적인 원수들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배후에 궁극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잊기가 쉽다. 그분의 섭리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는 입술로만 고백하고, 우리의 감정과 반응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행위자에게 기울어지기가 쉽다. 결국 눈에 보이는 행위자, 즉 인간이 더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그분의 선한 계획을 이룰 뿐이라는 믿음은 너무나도 쉽게 잊혀져서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섭리 건망증’(providence amnesia)으로 고통받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보기


우리는 모든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폴 트립(Paul Tripp)은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이렇게 드린다고 한다. (1) “주님, 오늘 저는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2) “당신의 은혜 가운데 저를 도울 자들을 보내 주소서.” (3) “도움이 주어질 때는 그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제게 주소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날마다 준비시키는 일은 스스로의 눈을 열어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행동을 보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의 손길을 지켜보아야 한다.


게다가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우리는 그들의 악한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숙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힘들다면, 다른 이의 악한 의도에만 집중하는 자들에게 주는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의 충고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열 번만 바라보라. 이는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권했던 일이다. 그리고 욥이 했던 일이기도 하다(욥 1:21).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의 악한 의도를 그저 무시한다고 해서, 그 의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묵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삶을 위한 교리


이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그 작은 방에서 혹여라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대화를 다시 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얼마나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내 손바닥은 땀에 흠뻑 젖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는 갖지 못했던 확신을 이제는 갖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난 사람들이 내뱉는 날카로운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기를 기대하고 싶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문제가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위대하고 자비로운 목적 속에서 우리를 빚어가기 위해 진행된다. 따라서 섭리에 관한 교리는 우리의 삶을 위한 가르침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Don’t Underestimate the Doctrine of Providence

역자: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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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tephen Witmer

스티븐 위트머는 Pepperell Christian Fellowship의 목사다.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소규모 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단체인 Small Town Summits의 공동 설립자로 섬기고 있다. A Big Gospel in Small PlacesEternity Changes Everything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