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에서 예술을 생각하다
by Makoto Fujimura2018-12-28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온다. 나사로의 죽음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을 보며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말 그대로 진(truth), 선(goodness), 미(beauty)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고” 베다니로 오셨다(요 11:4). 예수님이 도착했을 당시,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요 11:25).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곧 자신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권능을 갖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베다니에 오셨다면, 왜 간단하게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하셨더라면, 즉각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헛된 일, 아니 소모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연약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스스로 연약한 상태 속에 들어가셔서 사망의 괴로움을 직접 느끼셨다.


눈물을 흘린 다음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셨다(요 11:43). 예수님의 깊은 감정적 반응은 부활의 순간을 위한 준비 단계였던 것이다. 나사로는 비틀거리며 무덤에서 걸어 나왔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어서 당국자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획책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계속 길을 가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관한 마리아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베다니의 단단한 땅을 흠뻑 적신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눈물과 뒤섞였다. 예수님은 구주이기만 하셨던 것이 아니다. 친밀한 친구로도 드러나셨다. 이 인자와의 깊은 친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드러났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후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달려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쳤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비좁은 방으로 들어가 결혼을 위해 준비해 둔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 이 향유는 당시의 노동자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예수님의 모든 이적이 예수님을 속죄의 죽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이끌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리아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동시에 의도적인 헌신의 행위로 반응해야 했다.


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특히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불평했으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


예수님의 눈물은 베다니의 어떤 집에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마리아의 헌신을 낳았다. 여기서 벌어진 한 여인의 일탈적인 행동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활짝 열어 놓았다. 곧 고통 소리로 가득 찬 우리의 부서진 세상 속에 복음이 침투하는 현실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걸치신 유일한 땅의 것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였다.


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 향유와 같이, 예술도 어떻게 보면 여분 혹은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우리의 삶 속에 널리 퍼진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인생의 ‘여분’으로 생각한다. 곧 여가 생활에 불과한 장식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면, 무용수가 링컨 센터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이 ‘여분’으로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낭비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할 수 있다. 그날 밤 베다니의 한 집에서 마리아가 뿌린 향기 속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그림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칸타타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모든 창작 행위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분께 바치는 직관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이 직관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유해한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동력은 창조주에게서 나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격분하고 나드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막 14:5). 실용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힘을 파악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켜 죽이는 완고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겪는 고난에 실용주의적인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해를 끼친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발에 나드 향유가 부어지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생명을 빼앗는다. 예술가들은 마리아처럼 직관적으로 창조하여 그런 억압을 깨뜨릴 수 있다. 때때로 교회와 세상에서 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방해가 된다.


예술가들은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진실로 기쁨으로 나누어 주는 자는 단지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낭비하고 허비하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일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후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후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작업장에서 그림 위에 물을 붓고 그곳에 무기 안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는 낭비적이고 비싸다. 금, 백금, 은, 손으로 들어 올린 종이와 실크, 백 년 된 잉크 등 모두 내 그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재료들이 된다. 나는 내가 마리아와 같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의 눈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시다. 아마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보신 것은 자신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반사하는 한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


마리아는 왕이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로 전율하면서 그런 사랑의 행위로 당시의 문화 규범을 어겼다. 이 한 행위로 마리아는 그 순간의 신비를 깨고 열어 놓았다. 마리아의 나드 향유는 퍼져서 향기로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덧없는 행위였다. 곧 마리아가 ‘예술’로 생각조차 못했던 행위였다. 그녀의 행위가 기념될 것이며, 영원한 유산을 남겨 놓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도리어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가 행한 일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특별한 선언이 갖고 있는 논리적 결과를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복음 사역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향기로 흠뻑 적셔 있는가? 유다의 가면을 벗기는 우리의 아름답고 호화로운 예물, 곧 장차 임할 우주적 혼인을 준비하는 예물은 무엇인가?


우리가 낭비로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 그분의 눈물은 아름다웠으며, 우리를 부활에 대한 가장 큰 소망으로 이끈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Beautiful Tears

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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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koto Fujimura

마코토 후지무라는 예술가이며 작가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s Brehm Center for Worship의 디렉터이며, The International Arts Movement의 설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