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주의에 저항하라
by Carl Trueman2018-12-26

문화에 대한 상반된 목소리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현대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주제가 되었다. 성경에 기반한 문화 저항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문화 옹호론 사이에 문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는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현대 문화를 옹호하는 크리스천에 대하여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가 우리가 일컫는 대중문화, 특히 젊은이들이 거의 주도하는 영화, 인터넷, 음악 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날 ‘문화’는 대중문화를 의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이 공급과 소비로 대표되는 시장주의의 틀 안에 축소되어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등은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당장 잘 팔릴 것과 잘 팔리지 않을 것, 즉 상품성을 반영한다. 그러한 대중문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들의 기호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문화에 대해 논의할 때 현대의 상투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인 ‘현대 문화는 항상 변하고 있다’라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대 문화가 항상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변화 자체가 현대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들(패션, 음악, 연예)은 늘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변치 않는 본질인 소비주의의 단면이다. 소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그 집단을 유지시켜 나가는 본질적 엔진이 곧 변화이다. 의도적인 진부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품과 이를 팔기 위한 시장, 새로운 것에 대한 탐욕 등이 문화를 급속한 변화로 이끄는 필수적 요인이다.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한 대의 텔레비전, 한 대의 냉장고, 한 대의 스마트폰으로 만족하고, 또 한 벌의 멋진 정장을 입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2년에서 3년 사이에 스마트폰을 바꾼다. 자주 바꾸는 것이 좀 부담스럽더라도 우리는 삶의 많은 물질들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간다. 이전 모델보다 기능적으로 더 나은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유행에 더 맞는 것으로 바꾼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대표들(청년문화와 스포츠)도 똑같이 급속한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어떤 청년이 작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어 하겠는가? 또한 국가대표 팀을 비롯해서 갈수록 많은 스포츠 팀이 유니폼 디자인을 매우 자주 교체한다. 이는 관중들로 하여금 최신 디자인의 유니폼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더불어 그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기를 불어넣어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는 내가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일종의 착시 현상과 같다. 세상은 영원히 변하고 있는 상태로 보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마치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그림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한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착시 현상일 뿐이고, 모든 세대가 자신에 관해 믿고 싶어 하는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神話)를 낳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작년에 나와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마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된 한 가지 문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변화를 숭배하는 소비주의 문화다. 이 소비주의 문화는 교회가 반드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 문화의 본질이다.


그러면 교회는 소비주의 문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바로 그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든 교파 차원에서든 반-문화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책이나 TV 프로그램 등을 대상으로 선포한 ‘문화 전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문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소비주의의 열매 안에 기독교 정통주의를 반대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견고하거나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해체되거나 무너지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할 때, 고정 불변의 진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래서 의미의 참된 정의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이 물질적 소비를 따라 가는 방식과 세상이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 방향이 동일하다. 끊임없는 변화가 세상을 유지시키는 한 요소로 간주될 때, 이 변화의 문화는 불가피하게도 우리가 어떤 옷을 사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해, 변화의 미학이 곧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결정짓는다.


둘째, 소비주의가 끌고 가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안에서는 시장에서 내쳐지지 않을 상품을 찾는 것, 그리고 내 상품을 소비자가 사고 싶게끔 매력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안에서 정통주의가 상품으로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팔린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비주의 문화는 정통주의를 손질하여 변화시키고, 재포장하고, 더 매력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시장에 등장하는 다른 매력적인 상품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


요약하면, 기독교는 그 자체로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고, 바울 당시의 예수님은 오늘날의 예수님이며, 하나님은 유일한 조물주이시고, 그 외의 존재는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소비주의 문화의 피상적인 특성과 근본적인 특성 모두에 저항한다. 피상적 특성이란 ‘안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소비주의의 겉모습’을 말하고, 근본적인 특성이란 그 소비주의를 변함없이 유지시키는 방식인 생산자-소비자 형태의 사회구조적 역학 관계를 의미한다.


이 즈음에서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혁명을 팝니다’(Nation of Rebels: Why Counterculture Became Consumer Culture)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조셉 히스(Joseph Heath)와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는 1960년대에 ‘노 로고’(No Logo)와 같은 표어의 등장을 통해 소비주의가 어떻게 반-문화주의마저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는지 보여 준다. 1960년대의 미국에서는 브랜드와 소비로 점철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이 부상했는데, 시장은 이를 ‘노 로고’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어 관련 상품과 이미지를 판매하는 전략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반-문화주의가 상품이 되면서 그 진정한 저항 정신은 흔적 없이 종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노 로고와 연관된 상품은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진지하게 되짚어 봄으로써, 소비주의는 지금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 가운데 하나이고, 심지어는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정신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교회가 단순히 변화에 변화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화를 이끄는 동력들, 곧 상업적 마케팅, 탐욕, 능력과 성공에 대한 세속적 개념, 복음보다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는 욕구 등과 교회가 어떠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 정치에서 사용되는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행동은 지역적이되 계획은 글로벌하게 유지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확실히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예컨대 매주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도신경을 낭송함으로써, 기독교는 다시 만들어지는 종교가 아님을 교회와 세상에 명확히 선포해야 한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직분이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사다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이런 저런 정치적 연설에 대해 공허한 통찰력을 전파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은 장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가장 피상적인 증상에 불과하다.


멈출 줄 모르고 변화하는 특성의 우리 문화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시 바꾸고, 재포장하는 가공할 만한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소비자에게 그 진리를 상품의 형태로 판매함으로써, 변화의 문화는 본연의 힘을 유지 및 확장시켜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로서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저에 흐르는 소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빙산의 일각처럼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협은 수면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 교회는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변화의 문화에만 저항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본질적 특성에 저항하도록 부름 받았다. 저항해야 할 그 특성은 바로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전체적인 경제적 관점과 행위를 장악하여 대중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삶과 사회를 지배한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How Consumer Culture Fuels Change

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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