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우정
by John Muether2018-12-11

여러분은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어떤 독자에게는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예견은 사람의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짧은 가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에 근거한다.


구글이 미국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애틀랜틱 먼슬리'(The Atlantic Monthly)의 도발적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 검색 엔진인 구글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분명 우리의 심리를 더 불안하고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 안에서 이전만큼 집중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멀티태스킹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단편화하고, 문자 메시지의 끊임없는 도착은 조용히 반성할 시간을 방해한다. 불과 글 몇 문단을 읽기도 전에 집중력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오늘날의 우리는 심오하고 사려 깊은 독서 습관을 잃어버렸다.


핸드폰,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더 새로운 것까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전자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들이 삶을 장악하도록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독서 습관을 빼앗긴 것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를 더 잃었다. 첫째는 우정 관념이 하찮은 것으로 변했고, 둘째는 공동체 의식이 감소했다.


1,035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를 가진 동료가 있다. 페이스북 기준에 따르면, 그 정도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일부는 거짓 관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이스북의 목적은 넘쳐나는 나의 일상적 정보를 과시하는 정도다. 예를 들면, 오늘 당신이 받은 내시경 검사 결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페이스북 게시를 통해 내게 알려진다. 반면, 여러분과 진짜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당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왜 트위터를 통해 알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아무리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을 모았는데, 약 4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그 중의 4분의 1은 만나 본 적도 없는 관계들이다(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나누었던 적도 두 번 정도 된다). 이러한 교제는 사실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곧 만나기를 바란다”라는 문구로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온라인 친구들에게 이 말은 결국 상투적인 문구가 되고 말았고, 더이상 그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경험은 진짜 우정이란 실제 만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전자 문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관계를 멀리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은, 전자 문화는 우리를 가까운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한편, 먼 사람들과는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거리를 극복하고 “다시 연결되었다”라고 헛된 자랑을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학 기술의 피상성은 전자-갈등(e-conflict)의 확산으로도 증명된다. SNS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의 상당수는, 심지어는 오랜 친구와도 심각한 불통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소한 온라인 유머라고 생각한 컨텐츠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장난이 심하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낸 유머에는 단지 컨텐츠만 있을 뿐 그것을 전달하는 나의 표정이나 태도, 언어, 혹은 억양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대면해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또한 소셜 네트워크는 우정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보이기 위한 욕망으로 친구들을 모집한다. 또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주목을 끌게 될 때, 독자적인 온라인 인격이 조심스럽게 형성된다(심지어는 다중 정체성과 젠더 벤딩[성 역할 파괴]까지 생긴다). 크리스틴 로젠(Christine Rosen)은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네 자신을 나타내라”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문화 속에서 수치심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에 거침이 없는 이유는 새롭게 공유되는 엄청난 양의 무의미한 글들 속으로 나의 어제는 곧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로젠은 페이스북을 “단조로운 독특성, 판에 박힌 개인성, 특이한 동일성을 가진 매우 둔한 곳”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된 친구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깊게 교제할 시간을 빼앗아 간다. 클릭 한번으로 수십 명의 친구들을 ‘참견할’ 수 있는데, 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전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게다가 꽃이나 선물을 보내려 해도 사이버 꽃은 실물보다 훨씬 싸거나 값이 아예 없다. 이 모든 특성이 결국 우정을 경쟁으로 둔갑시킨다. 나는 언제 내 친구의 계정에서 ‘좋아하는 소수 그룹’ 안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의 모든 사례에서 보듯 우정은 실리적인 목적으로 변할 때 값어치를 잃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된 우정을 성취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가족, 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도록 명령받은 이웃과 달리, 우정은 독특한 근거에 따라 전개된다. 우정은 선택을 필요로 하고(가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또 높은 수준의 신뢰, 존중, 그리고 일정 부분 사생활의 공유까지 요구한다. 요약하면,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난주에 일 때문에 한 젊은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가 옛 친구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연락한 것을 삼촌에게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한 것이 연락인가? ‘연락하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지금 친구인가? 여기서 잠시 페이스북으로 돌아가자면,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얄팍한 친근함을 기초로 친구와 친구(또는 친구의 친구)를 서로 맺어 준다. 그것은 관계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물과 같다. 다시 돌아와, 어쨌든 그 친구가 20년 넘게 당신과 연락이 끊겼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서로에게 우선적으로 연락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몇몇 긍정적 측면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테이블톡'(Tabletalk)의 편집자이자 나를 오래 참아 준 크리스 도네이토(Chris Donato)가 건강한 둘째의 아빠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는 내가 기고문의 기한을 넘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미 확립된 관계를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온라인으로 맺은 친구 관계는 과연 어느 만큼의 지속성을 갖게 될 것인가?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이 진정 필수적이고, 더 중요하게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교제하는 친구들과 견줄만한가?


소셜 네트워크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 매체들이 거듭 강조하는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 약속이란 SNS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게 해 주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생긴 관계적 균열들을 매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을 확고하게 지키는 곳은 교회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교인들을 향해 갖고 있는 열망은 개인이 진정한 친구들에 대하여 품는 열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교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지 알게 되면 실로 놀랄 것이다.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들’은 종종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강한 교회들은 성도 간의 직접 교제를 온라인 모임으로 대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정확히 교회가 할 일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터넷을 통한 관계의 활성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셰인 힙스(Shane Hipps)는 ‘깜박이는 픽셀’(Flickering Pixels)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 소셜 네트워크—교회나 어떤 가정에서의 식사 혹은 친구들과의 점심 같은 모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잠재우는 알약과도 같다. 당신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로그인을 할 때, 종종 진정한 소통에 대한 혼란이나 욕구가 찾아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잠해지고, 결국 공동체가 아닌 혼자만의 교회에 남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이버 교회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온라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로 다양하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서의 동질성은 사실상 사이버 문화 특유의 격리성이 단지 공동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퍼트남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 자본인 공동체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을 (인터넷으로는) 절대 되돌려 놓을” 수 없다.


실제의 공동체가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가상의 공동체는 참여만큼이나 탈퇴도 무척 쉬운 이점을 갖고 있다. 마치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온라인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다. 또 조금이라도 불편한 온라인 친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친구 목록’에서 삭제시킬 수도 있다. 이런 퇴출 전략을 가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생활 방식 집단(life-style enclave, 역주—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부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모, 소비, 레저와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자기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보다 공동체적 연대감이 훨씬 약하다. 한 사회학자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로 매우 적절하게 묘사했다. 물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인터넷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극대화시키고, 이 사상들의 부정적 단면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장악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멀티태스킹, 분할 화면, 신호음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화에 강력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대학의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ze)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장단점"을 잘 구분하라고 권면한다. 당신을 실제로부터 격리시키는 과학의 진보를 경계하라. 이것이 당신의 영혼, 지성, 그리고 교회에 유익하다. 우리는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고 친구들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기 위해 지금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작은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럼 이제 다른 글들도 여유를 가지고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연필을 들어 친구에게 편지도 써 보라. 문자 메시지나 블로그에 쓰는 것은 반칙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Virtual Friendship
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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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Muether

존 뮤더는 플로리다주 올란도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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