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가르는 표지
by Sean Michael Lucas2018-12-06

우리에게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한 바른 지침과 표지가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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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회중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는 황폐한 시대도 간혹 있었다. 또한 그런 시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사람들은 영적 관심을 강렬히 나타내며, 뚜렷한 부흥의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나는 대각성의 시기도 있었다.


목회자들이 참 회심과 거짓 회심, 또는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구별하도록 지침을 제시하는 일은 바로 그런 각성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기독교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간혹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교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면 그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한 바른 지침과 표지가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영적 각성이나 진정한 회심을 구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지 가운데,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가 있다. 여기서는 진정한 회심과 부흥을 알아볼 수 있는 참되고 신뢰할 만한 표지를 제시하기 전에, 바로 그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를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지적하고자 한다.


고조된 감정


신앙적인 관심을 잘못 판단하게 하는 표지 중 하나는 고조된 감정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거나 죄에 대해 압도적인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 반드시 회심이 일어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강력하고 고조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월드시리즈나 슈퍼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는 경험을 하지만, 그런 감정은 영적인 운동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열변을 듣는 시민들은 큰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깊은 분노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이 회심을 이끄는 역사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과거에 드린 예배를 생각해 보라. 음악이나 설교가 마음 깊이 와 닿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이 움직이고, 그 순간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대체로 삶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만한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룩한 삶을 새롭게 실천하게 만드는, 즉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은 고조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이 지속적인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준비된 간증


또 다른 그릇된 표지는 우리의 신앙 경험에 대해 미리 준비된 내용을 전달하는 간증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의 심적 변화에 대해 그 자리에서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는 경우, 우리는 그 간증이 참된 회심의 표지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캐릭터 수다쟁이가 우리에게 경고하듯이, 단순히 신앙 경험이나 교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진정으로 회심하거나 각성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거짓 종교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과 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절박한 영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성경 인용


진정한 회심과 참된 부흥을 구별할 때 그릇되게 사용되는 세 번째 표지는 성경 구절을 길게 인용하는 능력이다. 이를테면, 진정한 영적 각성에 대한 증거로 흔히 인용되는 특정한 성경 구절이 마음에 즉각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표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귀도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성경 본문을 인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가 그분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떼어놓고자 시편 91편을 잘못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동안은 즐겁게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등을 돌리고 만다. 마태복음 13장은 돌밭으로 비유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겠지만, 시련의 때가 오면 거짓 회심자임을 드러내고 만다고 가르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성장하는 듯이 보여도, 결혼생활이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시련을 당하는 때가 오면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성경의 인용 또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다고 해서, 참된 회심이나 부흥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영적 체험


자신이 죄나 사탄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느낄지라도 참으로 회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본인이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염려하고 심지어 절망을 느낀다고 생각해 보자. 이는 영적인―심지어는 마귀적인―압박감에 해당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적을 경험한 것처럼, 마치 마귀가 쫓겨나고 억압이 그치고 어떤 중독에서 벗어난 듯이, 자신이 문득 구원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손이나 옆구리에 상처가 난 어떤 사람을 꿈이나 환상 속에서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경험이 확실한 회심이나 진정한 부흥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배에서 느끼는 자유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예배를 통해 심적인 자유를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회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신앙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부흥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회심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단순히 예배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고 해서, 또는 그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흥의 징후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느끼는 자유도 참된 신앙의 확실한 증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자유롭게 마음을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혹 설교 시간에 ‘거룩한 적막함’을 유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심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지만, 그러한 갈망이 회심이나 부흥의 확실한 표지는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표지들은 신앙적인 관심이나 진정한 회심 또는 참된 부흥을 잘못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그릇된 표지들이다. 따라서 이런 표지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영적 상태에 대해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 진정한 회심, 그리고 영적인 각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표지들은 무엇인가?


참된 표지들


한 가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은혜로운 감사’(a gracious gratitude)라고 불렀던 표지이다. 은혜로운 감사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실 수 있거나 하신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 인도하심을 기뻐하는 삶이 곧 제자의 길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큰 기쁨’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기 시작하고, 죄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느끼기 시작한다. 따라서 죄는 그들에게 점점 더 쓰디쓴 경험으로 다가온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세 번째 표지는, 그의 삶에 두루 퍼져 가는 ‘겸손’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 신자들은 하나님 및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된다. 그러한 겸손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통해서만 생긴다. 진정한 회심은 항상 겸손을 수반하는데, 그 이유는 회심이 본질적으로 교만을 꾸짖고 자기 신뢰를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을 갖게 된다.


끝으로 하나님이 누군가의 삶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거룩한 순종의 실천’이다. 성령님이 참으로 어떤 사람 안에 거하신다면, 결과적으로 거룩함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새롭게 일어난다.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내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영역이나 문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즐겁게 실천하는 성도로 가득한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는 부흥의 실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그러한 교회를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원제: True Revival and False Revival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즐겁게 실천하는 성도로 가득한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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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ean Michael Lucas

션 마이클 루카스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는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사 교수이자 학과장이며, 테네시주 멤피스에 위치한 Independent Presbyterian Church(PCA)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 'For a Continuing Church'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