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간의 불일치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가?
by Robert Plummer2018-11-27

우리는 성경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언급하며, 두 명의 저자를 그 시편에 적용한다. 처음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윗의 글에”(히 4:7)라며 동일한 시편에 대해 두 저자를 언급한다. 이는 성경의 오류일까?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중 저작, 즉 성경의 공동 저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옳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을 전하실 수 없다.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내용은 완전하게 진실이다. 크리스천은 이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나란히 펼쳐 놓고 보았을 때, 표면상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이렇지?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


복음서들이 불일치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다른 목격자에 의해 같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재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증인의 서술은 요약, 부분적 보고, 대안적 표현(paraphrasing), 자료의 연대기적 재배열 등을 거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정확히 이런 식의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들이 모순을 포함하는가?


1세기 인물인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는 복음서의 기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상술한다. 파피아스에 의하면, 마가는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후에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적 이유로 인해 그는 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반영하지 않았다. 최초의 독자들은 복음서가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의 뒤바뀜이 있다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엄격하게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면, 복음서의 기록을 ‘실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은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복음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 같은 시험이 두 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순서로 시험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강조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마태는 산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래서 5-7장에 걸쳐서는 산상설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마지막 장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마 28:16-20). 이런 측면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


반면, 누가는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을 강조했기에 성전 모티프에 관심이 깊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전 시험을 마지막에 배치했다.


이렇듯 마태와 누가는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복음서도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연대기적 특수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과거 성경의 저자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진리가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약국 주차장에 세워 둔 아내의 미니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다행히 내가 나의 경차를 가져다 주어 아내와 세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그 사이 나는 미니밴을 지키며 수리공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메일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어제 제 아내의 미니밴이 주차장에서 고장났습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 차가 어제 고장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웃에게는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는 어제 본인의 차가 고장나서 제 경차를 운전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위와 같이 그 묘사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경우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아마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에게는 미니밴이 있는가, 아니면 경차가 있는가? 무슨 차가 그녀의 차이며, 도대체 어떤 차가 고장난 것인가?” 구어체에서 ‘차’(car)는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혼이라면, 남편의 소유는 아내의 소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이 그녀의 미니밴 호칭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니밴은 내 차이지만, 아내가 항상 몰고 다닌다.


당신이 고장난 차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상세히 조사한다면, 내가 부분적인 사실만 언급했거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해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거짓은 아니다.


이는 복음서의 상세한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마태복음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라.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서로 다른 이름들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이어가는 세대들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차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


300년대 전반에 글을 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설명하며,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견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율리우스는 16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이복 형제자매의 육체적 후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초기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아프리카누스에 따르면, 계보상 불일치는 ‘계대 혼인’(곧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과 결혼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과부가 된 여성을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과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갔다. 이 제도는 법적인 계보와 생물학적인 계보를 둘다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법적 계보를 따르느냐,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르느냐에 따라 계보상에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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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들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계보의 복잡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반영한다. 따라서 면밀한 연구에서 표면상의 불일치가 관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초기 크리스천들은 불일치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를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했다.


만약 당신이 성경에 회의적인 독자라면, 스스로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염려되는 부분을 놓고 기도하라.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 본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라.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후 답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


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이미 역사 속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다. 더불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또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계시에 관한 확실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Do Inconsistencies in the Gospels Undermine Scripture’s Inerrancy

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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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obert Plummer

로버트 플럼어 박사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과 학장이자 신약 해석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