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
by Michael Reeves2021-12-07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담이 물리적 실재로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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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게재한 “‘첫 사람’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담, 인류의 머리됨 


인류와 아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항상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오래된 논쟁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과 인류 사이의 물리적 연결에만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담과 인류의 물리적 연결은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과 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개별 인간 각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는 것은 그가 아담과 근본적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담의 죄를 따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의를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과 저주는 다른 누군가의 상태(status) 때문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을 가진 대상을 본받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12-21과 결코 일치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로마서의 이 본문은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바울을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인류를 다루신다. 곧 아담, 모든 인류 중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머리, 또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새 인류의 처음이자 머리. 


왜 아담의 정체성 및 아담과 나머지 인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자꾸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구원과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 사이의 논쟁을 실제로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논쟁에 근원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현대의 가장 난해한 공식들에도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실은 전체 (아마도 신석기 시대) 인구 집단의 상징이며, 그 인구 집단에서 어느 날 죄가 나타났고 또 모든 인류에게 퍼졌다는 데니스 알렉산더의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펠라기우스주의의 문제는 인류 대부분의 문제에서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가마득한 원시시대 극히 소수의 문제로 간단히 바뀌어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의 틀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머리로서 아담을 부인하게 되면 개별 인간의 운명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개인이 결정한다는 [펠라기우스주의] 식의 해석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개별 인간의 자기  결정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기보다는 모범으로 보려는 경향도 커지게 된다. 


머리됨에는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


또 다시 데니스 알렉산더는 그의 합성 이론에서 이런 함정을 교묘하게 회피한다. 아담을 옛 인류의 머리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중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아담이 결코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자신의 견해를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신학적 사실과 통합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식은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이 가지는 법적 또는 계약적(federal) 지위를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 머리 또는 아버지라는 개념에서 분리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아담을 단지 모든 호모 디비누스뿐 아니라 모든 호모 사피엔스를 대표하는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이 처음으로 (알고도) 죄를 지었을 때, 호모사피엔스들이 아담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호모 사피엔스에게 전가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아담의 신석기 공동체에 연결되지 않은 앞에서 언급한 한 인간 집단을 들자면) 호주에 살던 계몽되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아담의 계약적 머리됨(대표성)을 그의 자연적, 물리적 머리됨에서 분리해 냄으로써 알렉산더는 이제 낯익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첫째,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존재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신학적 확정을 하신다. 아담은 물리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어떤 것(인류의 머리)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담과 하등 관계가 없는 순진한 호주 원주민에게 죄를 전가하시는, 독단적인 신이 되고 만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아담은 아무런 연결의 근거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그들도 아담의 죄를 공유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무슨 근거에서? 하나님의 변덕에 근거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머리됨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개별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그 영향이 미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후손이다(그렇기에 구약에서 족보는 중요하다). 그런 사례가 무척 많지만,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에게 내린 복이 그들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는 여호야긴에게 내린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라. 거꾸로,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안에서” 행동한 것으로 간주된다(히 7:9-10). 다시 말하면, 개인의 머리됨 또는 집단적 본성은 결코 실제적 연결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아담 안에서” 났는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이야기가 옮겨간다면, 진정한 연결의 필요성은 더 명확해져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일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 거듭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진정한 존재론적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된다. 성령이 그러한 연합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지 하나의 법정 가설(legal fiction)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두 가지 방식, 곧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와 육신에 의한 아담과의 연합 안에서 작동하는데, 여기서 본질은 이것이 서로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연결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다 법정 가설이 될 수 없는 것은, 온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옳은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굳이 존재론적 토대를 두지 않고도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리스도를 위해) 계약적 머리(federal headship)를 세우실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담과의 연합의 병치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이라는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신성한 명령으로 개인의 의를 세우셨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이 부족할까? 성령이다. 따라서 이 모델은 삼위일체적이지 않다. 바울의 아담-그리스도 병치가 맞는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실제적인 연결도 없이 아담과 결합될 수 있다는 제안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를 수 없게 한다. 


고린도전서 11:3의 논리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아내와 그 어떤 존재론적 연결도 없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인정하는 것이 이상할 것 같다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아무런 존재론적 연결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울 것이다. 머리됨에 대한 이런 식의 가벼운 존재론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아리우스주의나 삼신주의에 빠지기 쉽다. 물론 두 경우 다 그런 식의 결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머리됨에 관한 문제가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담이 물리적 실재로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이 모든 인류의 기원이 된 한 사람임을 암시하는(행 17:26) 정황적인 성경 증거와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아담이 모든 인류의 머리인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아담이 전 인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


심지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Nazianzen)가 깔끔하게 표현하기 전에, 속사도시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론의 상당 부분이 이 사상, 곧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감당하지 않은 것은 결코 “치유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사상이 형성되었다(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ume Ⅶ Cyril of Jerusalem, George Nazianzen, 438쪽). 본질적으로 그것은 히브리서 2:11-17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오셔서 구원하신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야 이 살과 피가 하나님의 저주를 지나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성육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은 참으로 그가 우리와 같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훼손하고 그분이 가져오신 구원을 훼손하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신학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단절된 호모 사피엔스의 여러 구성원 중 하나일 뿐이라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은 다소 걱정스럽게까지 보인다.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이 나의 육체가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인성을 가진 육체였다면, 그는 결코 나와 같은 혈육을 가진 구속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속사도시대의 교회가 히브리서 2장을 제대로 읽었고, 성육신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옳았다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인성이나 취하신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평결: 역사적 아담은 중요하다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성경이 아닌 다른 데이터 및 이데올로기와 조화를 이루기 쉽다. 물론, 본질적인 면에서 굳이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교리도 적지 않다. 


아담의 정체성, 그리고 인류의 물리적 조상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결코 독자적이고 역사와 분리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은 죄와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뿐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 필수적이다. 모든 인류에 대한 아담의 물리적 아버지 됨은 아담 안에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존하며(같은 추론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도 보존한다), 또한 성육신의 논리를 보호한다. 멋대로 재해석하는 믿음이 초래하는 결과는 실로 심각한 재앙일 뿐이다. 


이 글은 Should Christians Embrace Evolution?: Biblical and Scientific Responses, Norman C. Nevin 엮음(P&R, 2011)에 실린 Michael Reeves의 글을 갈무리한 것입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은 죄와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뿐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서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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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Reeves

마이클 리브즈는 King's College(PhD)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영국에 있는 Union School of Theology의 신학부 학장이자 교수이다. 저서로는 크로스웨이에서 조만간 나올 ‘Rejoice and Tremble: The Surprising Good News of the Fear of God’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