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람 아담’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by Michael Reeves2021-12-06

바울의 복음에서 역사적 아담을 제거한 채 그 복음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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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보통 복음서를 탈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드러내는 일종의 신화적 묘사로 보는 식의 해석을 반대한다. 반대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역사성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라는 성경의 두 인물과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안에 이들을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인물로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하다. 까다로운 문자주의자의 주변 문제까지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담을 인류 전체의 조상이 되는 역사적 인물로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바로 이것이다.


아담은 역사에 존재한 사람이다


텍스트 증거

창세기 처음 몇 장은 종종 ‘아담’이라는 단어를 “인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예, 창 1:26-27). 그리고 아담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장들에 어떤 문학적 구조가 분명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아담을 실제 존재했던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파악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이미 질문이 생긴다. 그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기 위해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예를 종종 만난다. 굳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나, 복음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에 맞추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예로 든 두 사건의 경우에 주석가들 대부분이 그 역사적 사건의 신학적 중요성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문학적 장치가 사용되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이 경우에 “문학적”이라고 해서 꼭 “문자적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다. 아담의 경우에는 “문자적 사실”이 배제된 “문학적” 장치일 뿐인가? 아담을 언급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창세기 5장역대상 1장,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모두 다 아담을 첫 조상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성경의 족보를 보면 이름을 종종 생략하기는 하지만, 허구나 신화의 인물을 족보에 넣는 경우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4-6에서 혼인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그리고 유다가 유다서 1:14에서 아담을 언급할 때, 그들은 아담의 역사적 실재를 의심한다거나 아담을 구약의 다른 인물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 어떤 암시나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나중에 여자가 아담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말하면서(고전 11:8-9; 딤전 2:11-14), 바울은 창세기 2장을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간주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만약에 아담과 하와를 역사가 아닌 신화적 상징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구절을 쓴 것이라면, 그의 모든 주장은 한마디로 난센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신학적 필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성경 저자들은 하나같이 아담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생각했다는 정황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정황 증거도 유용하고 중요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이 있다. 바울의 신학 안에는 아담이 맡고 있는 실로 엄청난 역할이 있다. 그것은 곧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사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본 줄거리에서 필수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담의 역사성은 단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첫 번째로 주목할 구절은 로마서 5:12-21인데, 여기서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죄와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의를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단수형 “자손”과 복수형 “자손들(갈 3:16)의 분명한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 사도이다. 따라서 그가 아담을 놓고 “한 사람”이라고 썼을 때, 그 의미는 결코 복수형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이 단수형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반복해서 대조되고 있으며, 이 단수 “한 사람”이야말로 한 사람(아담)의 한 번의 죄가 한 사람(그리스도)의 한 번의 구원으로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바울의 핵심 주장의 근간이 된다. 


이 본문 전체(롬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똑같이 아담에 대해 말한다. (또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사망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단어 사용은, 그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복에 대해서 말할 때와 유사하다.) 바울은 이 한 사람의 범죄가 있기 전(그 때는 죄나 죽음이 없었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범죄 이후(아담에서 모세까지 이어지는 기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바울이 아담을 그리스도와 모세(그리고 아브라함)와 똑같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의 인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단지 바울의 언어만이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신학 전체가 곧 그가 아담을 역사의 인물로 믿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바울이 역사적 인물(그리스도)을 신화적 또는 상징적 인물(아담)과 비교하는 순간, 그의 논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담과 그의 죄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굳이 역사 속에서 속죄가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다. 신화적 타락을 되돌리려면 신화적 속죄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신화적 인물이라면,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용서와 새 생명을 나타내는 단순한 상징 정도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온 죄와 죄책감, 사망이라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반드시 역사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이다. 


아담의 죄에서 역사성을 제거하는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논리나 근거만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바울의 복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도대체 죄와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만일 이것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단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곧 죄는 원래부터 있었고 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라고 선택하거나, 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각 사람이 저마다 거의 무에서(ex nihilo) 범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고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선하신 창조주와 그의 선한 창조세계를 일원론적으로든 이원론적으로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비기독교적 사고이고, 후자는 펠라기우스주의에 해당하는데, 선한 개인이 아담을 본받아 죄를 짓게 된다(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의롭게 된다)는 사고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역사적 아담이 갖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증언하는 두 번째 구절은 고린도전서 15:21-2245-49이다. 여기서 다시 바울은 죽음에 이르게 한 첫 사람 아담과 새 생명을 얻게 하신 두 번째 사람 또는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유사점을 풀어낸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언급된다. 또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생명의 기원으로 간주되듯이 아담은 사망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고린도전서의 이 곳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관련하여 일으키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과 관련한 목회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에 반드시 있을 육체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대한 확신을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하는 궁극적인 해답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만일 바울이 아담을 신화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바울의 글은 수사학적 어리석음의 극치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에 신화적 아담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 둘이 평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든지 신화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바울의 서신 전체가 그 핵심과 목적, 효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내가 고린도전서 15:21-2245-49에 담겨 있는 바울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면, 바울의 복음에서 역사적 아담을 제거한 채 그 복음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아담을 역사 속에서 제거한다면 바울의 신학 자체가 결국 탈역사화하고 말 것이며, 그 결과 악의 기원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을 주장할 것이며 구원에 대한 완전히 다른 방법을 요구할 것이다.   


제3의 길?

데니스 알렉산더(Denis Alexander)는 존 스토트가 제시한 이론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역사적 아담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이러한 전통적 입장은 이제 과학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견해로 갈라진 날카로운 이분법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다(Denis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 9-10장). 곧 아담을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적 인물로 봐야 하지만 굳이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알렉산더가 선호하는 모델에 따르면, 해부학적 현대인은 20만 년 전에 나타났고, 이 현대인의 언어는 5만 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6,000년에서 8,000년 전쯤에 하나님이 신석기 시대 농부 두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알고 영적 생명까지 갖춘 최초의 인간, 호모 디비누스(Homo divinus)가 되었다는 것이 알렉산더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면서 생긴 신학적 틈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실로 기발한 합성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새로운 근본적 문제 몇 가지를 스스로 야기한다. 첫 번째는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곧 이미 수만 년 동안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고 알렉산더 스스로 말하는 그 해부학적 현대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알렉산더는 현명하게도 그들이 완전한 인간은 못됐다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단호하게 강조한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신석기 시대에 세계에 살았던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포함된다”(238쪽).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 매우 불쾌하게 여겼을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알렉산더 자신이 말하길 아담과 하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4만 년 동안이나 호주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인구가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바고 그 순간 곧바로 비인간 상태의 동물로 강등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아닌 동물 단계였을 아담과 하와의 부모도 다른 호주 원주민과 함께 얼마든지 배고픈 호모 디비누스의 합법적인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피하는 바람에 알렉산더의 제안은 오히려 더 위험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동시대 사람들과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결정적인 주장을 한다. 아담과 하와가 태어났을 때,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대한 신석기 시대 인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를 다른 신석기 인구와 달리 호모 디비누스로 구별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질적으로 스스로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238쪽).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태어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오랜 가계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하는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이 성경적인 주장인지 여부다. 창세기 1장2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구체적으로 아담과 하와였다고 특정한다(창 1:27의 사건은 창 2:18-25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이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나중에 그 후손 몇몇이 그 사실을 알게 됐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정반대다. 창세기 2:7은 대단히 예외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이 인간 아담을 존재하게 하시려고 직접적이고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까지는 어떻게 해서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번째 신학적 문제가 이 사실로 인해 생기게 된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다면, 우리에게는 다음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아담과 하와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간이 있었다는 시나리오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두 명의 아담이 생긴다.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첫 인간 아담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류 안에서 서서히 진화했다는 시나리오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 집합체와 복수의 아담을 갖게 된다. 


이런 입장이 가져다주는 황당한 어색함과는 별개로, 이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눈덩이처럼 빠르게 불어날 것이다. 알렉산더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계시를 받지 못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알렉산더가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리는 이런 그림은 우상숭배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믿음은 아담과 하와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이나 신들을 찾았다”(237쪽). 따라서 이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 전에 이미 죄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런 죄를 무시했던 것 같다(무슨 근거로 그랬다는 건지, 우리가 알 길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셨다면, 그건 바울이 로마서 1:18-32에서 말한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를 향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창조세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 1:18이하를 보면, 알렉산더가 말하는 종교적이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아담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도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모델을 억지로 로마서 1장에 끼워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담에게만 베푼 특권, 그러니까 의로움 및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전혀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맘껏 죄를 짓고 우상숭배의 기회를 허용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게 되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계시를 받도록 택함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죄에 물들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계시를 받기 전까지 아담은 애초에 창조된 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계시를 받은 그 순간에 일시적으로 죄가 없다고 선언된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은, 항상 죄를 지어 왔던 아담이지만, 마침내 처음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죄를 지었다는 의미인가? 후자가 맞는다면, 왜 그 전에 지은 무의식적인 죄는 용서가 가능한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모든 죄도 다 정죄한다고 했는데 말이다(레 5:17; 시 19:12).


알렉산더의 주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정작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는 준 적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도록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별로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일해야 하는 신이다. 알렉산더의 주장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지금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마치 이 우주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은 하와의 창조에 대한 알렉산더 논평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하와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인간 부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창세기 2:21의 목적은 단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보완성의 확인이라고 주장한다(197쪽). 이 점이 이 본문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창세기 2:21을 단지 신화와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면, 존재론적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남녀의 상호보완성은 불가능하다. 하와가 아담과 별개의 물리적 기원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자신만 아는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남녀의 상호보완성을 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 어떤 존재론적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알렉산더의 확언(그리고 적어도 그의 다른 확언 중 일부도 해당한다)은 현실과 무관하게 둥둥 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신학을 근거 없는 허공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또는 비사건)에 의미를 접목하도록 강요받는 하나님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무지 주권을 가진 창조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만든 모델에 따라 창세기를 읽어 가는 알렉산더를 보면 마치 사각 구멍에 둥근 못을 박으려는 사람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자의 창조가 다시 좋은 보기가 된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썼다.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이자 살 중의 살’로 인정했을 때, 아담은 그 한 사람을 단지 호모 사피엔스로 인정한 게 아니라(하와뿐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까지 인정한 것이다”(237쪽). 이런 주장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내용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이 구절과 관련해서는 고전 6:16-17엡 5:28-31을 참조하라), 하와를 아담을 위해 꼭 필요했던 “돕는 자”라고 말한 성경 내용을 온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로 만들어 버린다. 창세기 2:18-20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는가? 그건 아담과 같은 차원의 다른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돕는 자라는 개념이 단지 다른 신자를 찾는 것이라면, 왜 들짐승과 공중의 새 중에서 찾지 않는가? 다른 곳에 있다가 아담에게로 이끌려 온 인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냥 주변에 있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의 의미를 계시하고는, 자연스럽게 아담에게 필요한 ‘돕는 자’가 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알렉산더는 비슷한 논지로 창세기 6:2을 해석한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통혼한다. 알렉산더가 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아담의 가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인 현대의 호모 사피엔스와 결혼하는 단순한 사건이다. 알렉산더의 적용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 6:5이하에서 보듯이 그런 경우에 홍수 사건과 같은 심판이 분명히 뒤따르기 때문이다”(199쪽). 그러나 창세기 6장의 교훈이 정말로 믿는 아담의 가계가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에 관한 경고라면, “경건한” 아담의 아들 가인이 믿지 않는 가계 밖 아내를 취했을 때, 홍수의 심판이 뒤따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241쪽 참조). 


내 생각은 이것이다. 아무리 독창성이 있다고 해도, 역사적 아담을 고수하는 알렉산더의 “제3의 길”(말이 아담이지, 알렉산더는 그를 최초의 인간으로 믿지 않는다)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제공할 수 없으며, 창세기가 내포한 각종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일부(앞에서 설명한 창세기 6장의 적용과 같은 경우)는 단지 그가 제시하는 모델이 내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성경의 설명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하나님을 주권적인 창조주로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 초래하는 다른 문제들은 너무 심각해서, 그의 주장은 아예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내일 “아담은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다”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원제: Does It Really Matter Whether Adam Was the First Ma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아무리 독창성이 있다고 해도, 역사적 아담을 고수하는 알렉산더의 ‘제3의 길’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제공할 수 없으며, 창세기가 내포한 각종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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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Reeves

마이클 리브즈는 King's College(PhD)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영국에 있는 Union School of Theology의 신학부 학장이자 교수이다. 저서로는 크로스웨이에서 조만간 나올 ‘Rejoice and Tremble: The Surprising Good News of the Fear of God’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