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가 꼭 가장 친한 친구일 필요는 없다
by Shane Morris2021-10-06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대부분의 결혼은 우정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요즘 들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만드는 조건으로 긴밀한 우정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흔히 소셜 미디어에 배우자 사진을 게시하는 젊은 커플이 자주 하는 말이 이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 흔히들 배우자를 향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결혼이 성적 매력을 초월한 수준에서 이뤄졌다는 사실, 즉 동반자적 관계의 연속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결혼 서약을 하러 주례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주로 플라토닉한 관계에 또 하나의 단계를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정을 결혼까지 이끌어낸 사랑의 정점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 우리 문화가 겪고 있는 혼란의 징후이며, 그런 현실을 보며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랑을 구별한 C.S. 루이스(Lewis)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절친과 결혼하는 것이 좋을 때


나는 진실한 친구로 교제를 시작했다가 결혼까지 골인한 많은 커플을 알고 있다. 그런 커플은 좋아하는 취미에서부터 종교까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대를 매력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은 대화 중에 서로에게 끌렸고,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사랑이라는 다른 측면이 드러났다. 


종종 매력은 다른 것보다 먼저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성적 매력이 드러나게 되고, 사랑이라는 막강한 힘을 그냥 표면 아래에 방치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할지, 아니면 받아들일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후자를 선택하는 커플(특히 남성)은 종종 눈이 열리는 경험(sense of epiphany)을 한다고 말한다. 


“나는 워낙 오랜 기간 이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겨왔기에, 사실상 그녀가 적합한 배우자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어요.” 때때로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친구로 지내는 여자가 신체적인 면에서 평소 남자가 생각하는 “이상형(type)”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들이 남편을 향해서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다른 사람과 낭만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우정이 애초에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아내인 조이 데이비드맨(Joy Davidman)을 향해 끌리는 진심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 무려 몇 년이나 걸렸던 C.S. 루이스에게 로맨스적 관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우정은 새롭고 아름다운 애정을 탄생시켰다.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사랑의 카테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그러나 결혼으로 이끄는 사랑의 절정 내지 그 이상으로 우정을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깊은 우정에 근거하지 않은 결혼을 애초에 뭔가가 결핍된 상태라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도 전혀 맞는 말이 아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마치 결혼이 (성적 관계 및 가족의 혜택까지 포함된) 반드시 강렬한 우정의 결과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다양한 단어와 개념을 심각하게 혼동시킬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대부분의 결혼은 우정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혼 중 상당수는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 필요성에 근거했다.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틀림없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결합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아닌 양가 아버지의 주선에 의해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결혼에 관한 교훈적인 구절 그 어디에도 배우자와 더불어 우정을 키우라는 명령을 찾을 수 없다. 


결혼과 관련해 성경에서 찾는 진리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중심에서 신성한 신비를 구현하는, 다스림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 관계가 드러내는 황홀한 비전이다.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솔로몬의 노래에서 찬양을 받고, 복음서에서 확인되고 옹호되고, 바울에게서 거룩하게 되며,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에서 성취되는 결혼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지 같은 방을 쓰는 동반자적 관계 그 이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에로스적 관계인 결혼을 주로 우정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는 것은 결혼과 우정 모두를 다 값싸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라는 말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를 단지 친구 상태로 두는 것은 신부이자 조력자라는 정당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할 내 배우자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우정을 에로틱하게 여기지 말라


우정을 결혼의 최고 기준(gold standard)으로 삼는 현대적 습관은 심각하면서 대중적인 또 다른 사랑 유형 간의 혼동과 유사하다. 우정이 에로틱해지는 반대 현상을 생각해 보자. 나는 최근 반지의 제왕이 동성애를 기저에 깔고 있다는, 피곤하고 불쾌한 주장을 반복하는 트위터를 보았다. 그 트위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J. R. R. 톨킨(Tolkien)은 단지 두 종류의 인물들만 썼다. 아내를 사랑하는 빛나는 남자와 여우 구멍을 갈망하는 동성애자.” 그보다 훨씬 더 현명한 어느 트위터 사용자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정을 실질적인 사랑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변장한 에로스나 에로스의 확장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친구가 있을 리 없다는 것.”


이 책에서 루이스는 우정과 낭만적인 사랑, 또는 필리아와 에로스의 차이점에 대해 그리스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을 이어간다. 


같은 사람을 놓고 에로틱한 사랑과 우정을 함께 가질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우정만큼이나 사랑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연인들은 항상 사랑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 연인은 일반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흡수된다. 그러나 친구는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공통 관심사에 몰두한다. 무엇보다 에로스(최소한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는 필연적으로 단지 두 사람 사이에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필요 조건도 아닐 뿐더러 반드시 최상의 숫자도 아니다. 


반성애(Demisexuality)와 진정한 에로스의 죽음


또는 에로스를 “게이”, “레즈비언” 또는 “양성애자”와 유사한 성적 정체성 내지 지향으로 재정의함으로 단순한 동물적 육체로부터 에로스 자체를 구하려는 노력을 생각해보자. 뉴욕 주지사의 딸인 미카엘라 케네디 쿠오모(Michaela Kennedy-Cuomo, 23살)는 최근 스스로 자신을 ‘반성애자(demisexual)’라고 표현한 내용이 담긴 인터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 신조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가디언지(Guardian) 칼럼니스트는 반성애자를 “일단 강렬한 정서적 유대가 먼저 형성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사람들”로 정의하다. 


그 칼럼니스트는 소위 성적 성향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눈에 띄지 않는지, 그렇기에 쿠오모와 같이 이미 부유하고 특권층인 젊은 여자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굳이 이처럼 난해한 성적 정체성을 선언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칼럼니스트는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있어서 감정과 관계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굳이 선언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가 되려면 우리 문화가 얼마나 더 성적이고 음탕해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성에 관한 대화에 실제 에로스(actual eros)를 다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낀 쿠오모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양한 유형의 사랑을 어떻게 혼동하고 또 융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제시하고 싶다. 


구원하는 사랑


우리 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때때로 사랑과 생식기를 동의어로 취급할 정도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사랑, 심지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까지도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의 강렬한 우정 형태에 불과하다는 영지주의적 이상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플레이보이(Playboy)와 홀마크(Hallmark, 카드 회사) 사이를 오가며 어떤 순간에는 동물적 욕망을, 그러다가 다음 순간에는 감상적인 사랑을 찬양한다. 


여러 사랑이 다투는 현실 속에서 볼 때, 진짜지만 시큰둥한 우정은 “억압된 동성애” 정도로 중상모략을 당한다. 그리고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 즉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도록 이끈 신성하고 영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다른 사랑들을 소생시키고 성화시키려고 의도하신 그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스토르게, Storge), 에로스 사랑(Eros), 친구간의 사랑(Philia) 및 아가페 사랑(Agape)을 올바르게 구별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문화가 각각의 사랑의 이해에 끼친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장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루이스가 이 네 가지 사랑에 대한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지식을 끌어낸 우물인 성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불어 루이스는 이 네 가지 사랑을 완벽하면서도 뚜렷하게 구분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연인인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마음을 고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원제: Your Spouse Doesn’t Have to Be Your Best Frien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배우자를 단지 친구 상태로 두는 것은 신부이자 조력자라는 정당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할 내 배우자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Shane Morris

쉐인 모리스는 Colson Center의 선임 작가이며, 'The Federalist,' 'The Christian Post'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