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시대에 대사명은 우리의 인도자이다
by Kathy Keller2021-08-24

이것은 “양비론 또는 양시론(both-sides-ism)”이 아니다. 오히려 스펙트럼의 모든 지점에 대한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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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계간지 ‘생명의 복음'(The Gospel in Life) 1주년 기념판에 실린 글이다. 2020년 3월 창간한 계간지 The Gospel in Life는 복음이 어떻게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과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실어왔다.

양극화 시대가 가져다주는 정치권력 다툼이나 문화 분쟁으로 인해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과 헌신을 바쳐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여러 번역판에서 일관적으로 “적절할 때, 합당할 때, 구분되었을 때, 택함을 입었을 때, 찼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점령된 팔레스타인에 오신 건 우연이 아니다. 성육신한 하나님이자 사람인 그는 완전한 순간에 그의 피조물에 들어가 구원하기 위해 영원 전부터 가장 적절한 시간을 선택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당시는 그렇게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이 징수하는 세금 때문에 압제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식민지였다. 오늘날 역사는 당시 통치했던 로마 황제들과 그들이 꼭두각시로 삼았던 유대 지도자들을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선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칼리굴라, 네로, 헤롯.


그런데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자세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제자들은 스승이 승천하기 직전까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압박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했다. 세상 국가의 회복을 신경쓰지 말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개종시키며 세상에서 제자의 수를 늘리라는 것이다. 마태는 이런 대사명(마 28:18-20)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고 특히 붉은 글씨로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에 특히 주목하는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정치적 영향력을 추구하기보다 복음을 전하라는 우리 구세주의 이런 확고부동한 명령은 오늘날 고도로 격렬한 정치 문화 상황에서 더 “필요하고, 관련있고, 적절한” 문제라는 우선순위에 밀려서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신학적 입장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더 적대적인 오늘날 문화에서 더 중요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전략을 포기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단체가 적지 않다. 다양한 미디어(SNS, 인쇄, 방송)를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사역과 설교,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라는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현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도자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정치적 차이를 극복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로지 인간의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도 교회만은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바로 제시할 것이라고 소망했다. 그 뿐 아니라 교회는 예술, 미디어, 정치, 그리고 비즈니스라는 대중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인(제자가 된 신자)을 파송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처럼 교회가 문화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성장(동시에 사회에서는 ‘소금과 빛’으로 봉사하는 신자의 수)과 대중의 수용 정도가 좌우되었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다른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도 시대가 바뀌었고 교회와 관련한 이런 의제가 더 이상 적절하지 않거나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런 기독교인은 세속적이고 진보적 좌파에 속한 기독교의 적이 신자를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고 ‘무시(cancel)’하며, 또한 대중적 영향력에서 배제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오늘날 강력한 목소리는 표현과 실천(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현대적 관점의 영역에서)을 통해서 반대 의견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제거할 새로운 체제를 강제로라도 부과할 것을 원하고 있다. 


이런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아카데미, 예술 및 정부 부처 등 많은 부분에서 문화에 영향력을 끼치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신자들은 곧 대기업, 대학, 그리고 공무원 취업에서 아예 제외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인에게 균형, 정중함, 정치적 중립 및 “기독교의 매력을 발산하는 문화 참여”를 기대하는 시대는 이제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설교자는 더 이상 “정치 위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더 이상 전도를 하는 등의 신실한 신자의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 구형 모델은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익 우선순위(낙태 종식)” 또는 “좌익 우선순위(고통 중에 있는 산모 중심)” 중 하나를 지지하는 진정한 신자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해법(정치권력)이다. 이런 논쟁에 발을 담근 많은 개인과 교회도 다 좋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결국은 현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교회의 설교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특집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 교회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와 관련해서 교인들이 좀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 주된 내용이다. 


남편(팀 켈러 목사)과 나는 교회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사회 정의 밖에 없는 사실에 절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과 매주 고통스러운 대화를 나눠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장벽을 허무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선한 의도를 갖고 일부러 다인종 교회에 합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교제와 대화를 가로막는 온갖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자주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그룹은 목사들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독교인이 나서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통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에 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다. 우리 부부는 단지 집회에서 마스크를 쓰라고 한 것 때문에 교인을 잃고 교회 분열까지 겪어야 했던 목회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낙태라는 악을 인식하고 끝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은 분명히 교회의 우선순위 중 하나이다. 낙태를 살인이라고 부르고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이다. 오로지 생명의 소중이라는 메시지만 전하겠다는 교회의 생각도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한 후에야 비로소 낙태 문제에 대해 확신하게 될 현재의 불신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자궁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아기와 엄마를 이미 하나로 묶어 주신 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신경을 써야할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고, 그래서 복음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면 과거에 낙태를 찬성하던 사람들조차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기꺼이 산모와 가족, 청소년을 지원하는, 낙태를 줄이는 사역에 동참할 것이다. 그런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어진다. 좌익과 우익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한쪽의 신념에 깊이 빠진 열렬한 옹호자는 정치 및 사회 정책에 대해 말할 때에 한해서는 예의, 균형, 그리고 겸손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모든 범위에 상주하는 죄와 일반 은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특정 지점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공공연하게 교회를 향해서도 정치적 집단이 되라고 요구한다. 


극단주의자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을 이제는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대담한 전술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또 자기 백성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 5장)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비난받기까지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을 성경적 권위의 수준으로 높이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도 그들은 무시한다. 


오늘날 문화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했고, 더불어 세속적이고 편협한 좌파 진보주의가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 속에서조차 신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설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종교적 신념을 민족주의 및 정치 권력과 결합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익 신념의 놀라운 증가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쁜 소식은 이들에게도 전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양비론 또는 양시론(both-sides-ism)”이 아니다. 오히려 스펙트럼의 모든 지점에 대한 비판이다. 로마서 3장 10-17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차례로 인용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0-17)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정치적, 사회적 가치의 어느 지점이든 가릴 것 없이)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잘못되고, 해롭고, 죄가 있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복음을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새 생명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술사이자 코미디언인 펜 질렛(Penn Jillette)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도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렇다, 나는 그런 기독교인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다. 말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영생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등등을 믿는다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전도하지 않는 건,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럴 가치가 없다고? …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전도하지 않는 대상을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는 걸까? 아니,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기에 그게 가능한 걸까?


그러나 현재 미국 교회의 상황이 생각과 행동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제자를 양성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공동체와 예배, 그리고 교리 교육을 강화하여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사회와 세계를 향한 건전한 복음주의 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제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자를 삼는데 효과적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복음으로 인해 사회 정책으로까지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방식에 대해서 서로 동의하는,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복음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초대 교회는 우리만큼이나 소외된 존재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효과적인 전략이 있었다. 교회는 도시에서 성장했다. 또한 주변화(marginalization)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내내 초대 교회는 우리가 지금이나 앞으로 겪게 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고 소외된 문화 속에서 살던 신자들이 받아들인 전도 전략은 무엇이었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되셔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과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와 같은 학자는 초기 기독교인이 주로 그들의 관계 네트워크 내에서 비공식적인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도를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이교도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득력 있게 구현하고 분명히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건 효과가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부르셨다. 소금과 빛이라는 각각의 이미지는 차이와 참여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준다. 소금은 고기와 화학적으로 다르지만 고기 속으로 퍼졌을 때에만 도움이 된다. 빛은 어둠과 다르지만 바구니 아래에 숨겨지지 않고 밖에서 감지할 수 있을 때에만 어둠을 밀어낸다(마 5:15). 따라서 교회는 비신앙 문화에 동화되는 대신 고유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 문화에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계속 참여하고 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비기독교인, 세속화된 기관 및 현장과 지속적인 관계와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을 단순히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자하라는 허락을 당신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받았는가?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는 것은 언제 그가 왕국을 회복할 것인지, 즉 언제 로마를 쫓아내고 이스라엘이 이교도에게 압제당하는 나라가 아닌 경건한 나라로 재건될 것인지이다. 그러나 예수님 초림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기 위함이었지, 억압적인 정치 질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실상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들이 사냥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또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기독교인은 정부에 의해 압제, 투옥, 고문을 당하고 있고, 교회는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숫자는 아마도 올해 안에 1억 명을 돌파할 것이다. 2030년까지 그 수는 3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그들 모두는 가장 가혹한 고난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정치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또한 조심스럽게) 예배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을 때도 예배와 전도를 계속하고 있다. 서방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이런 형제자매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영적인 권세라고(엡 6:12)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이 눈에 보이는 세상 권세라고 말하는 건, 시대를 초월해 거짓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해 온 위대한(?)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쉬지 않고 전파되어야 하고 또한 가르치고 생활 속에서 증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말씀을 고작 죽 한 그릇(권력)과 바꿔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며, 권력이 아닌 말씀과 삶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서 우리가 같은 생각을 가진 신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숨기고 보호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죄인과 세리를 만찬에 참여시킨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전도 전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1950년대 인도 성공회 선교사였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영국은 사라지고, 대신 나라 전체가 세속적인 이교 문화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귀환한 선교사는 애초에 그를 파송한 문화의 선교사가 되어야 했다!


뉴비긴은 이렇게 썼다. 


좋은 소식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생각하기 전에 부정적인 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질문이 교회의 생존에 관한 것인지는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 우리 사회는 이교도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인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비전과 (이 시대가 간주하는) 가정(assumptions) 사이의 모순이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에 빠져 교회를 단지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많은 “선한 일(good causes)” 중의 하나로만 생각한다. … 만약에 우리가 하는 “전도”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교회의 구조를 떠받치는 노력에 그친다면(때로는 그렇게 보인다), 결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다. 교회의 안위에 관해 우리에게는 걱정할 권리가 없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거시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온 세상에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다.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예수님의 명령에 맞는, 복음의 능력으로 탄생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로마서 12장 9-21절에 요약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때때로 다양한 설득을 통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도 하는,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일종의 현기증 나는 혼합체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9-21)

이 말씀은 상충되는 명령이 합쳐진 것처럼 들린다. 악을 미워하라는 명령에 주목하라. 원수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심지어 원수를 축복하기까지 하라고 한다. 이 부분도 주목하라. 열심을 내야 하지만 동시에 인내심을 가지라고 한다. 이 부분 역시 주목하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라고? 잠깐만, 바울이 마르크스주의자였던가?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라. 다른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하라. 서로 조화롭게 살고, 사람들이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했어도 복수하지 말라. 아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복음 전파는 오로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다른 어떤 메시지도 복음처럼 역동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의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하늘과 땅을 재창조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이런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런 놀라운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원제: The Great Commission Must Be Our Guide in These Polarizing Times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자하라는 허락을 당신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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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athy Keller

케시 켈러는 뉴욕시에 위치한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디렉터로 섬겼다. 대표 저서로는 'Jesus, Justice, and Gender Roles'가 있으며, 공저로 남편 팀 켈러와 함께 저술한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