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국가주의를 바라보는 지혜
by Tim Keller2021-08-18

오늘날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국가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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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무엘 페리(Samuel L. Perry)와 앤드류 화이트헤드(Andrew Whitehead)가 쓴 ‘미국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Take America Back for God: Christian Nationalism in United States, 옥스포드, 2020)’에 관한 팀 켈러의 서평으로 ‘기독교 국가주의 바로 알기’에서 이어집니다.

종교적 관습(practices) 대 기독교 국가주의 


그러나 기독교 국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이 기독교 국가주의가 아닌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반복해서 말한다. “일부 독자들을 놀라게 하거나 또는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백인 복음주의자에 관한 게 아니다. 확실히 백인 복음주의자와 기독교 국가주의 사이에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 …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전혀 동의어가 아니다. … 기독교 국가주의자 중 많은 사람이 … 복음주의적 특징을 가진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 비기독교인도 … 강한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주의적 믿음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주의와 종교적 헌신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중요한 부분에서 저자들은 바로 이런 사례를 제시한다. 조사 과정에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동에서 온 난민은 테러 위협이 된다.”, “미국의 전통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강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기도, 성경 읽기에서 열성을 내는 미국인일수록 이런 문제에 대해 기독교 국가주의자의 주장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과 기도에 더 시간을 쏟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적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국가주의는 높은 도덕 표준을 장려하지 않으며 자기 희생, 평화, 자비, 사랑, 정의 등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교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자와 달리 이민자를 환대하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데에 더 열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약자를 보호하라는 건 성경의 명령이고 성경에는 기독교 국가주의와 완전히 모순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종교 활동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믿음은 덜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반면에,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개인의 종교성 수준이 높아지면 섹슈얼리티, 젠더, 이혼에 대해 더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종교적 관습에 더 많이 참여하는 미국인은 “이민자를 배척할 가능성이 적고, 흑인에 대한 편견을 지지하거나 무슬림을 두려워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반대를 발견한다. 높은 수준의 종교적 헌신을 보이는 미국인의 경우에 … 그들은 가정에서 더 전통적인 역할을 원하고, 동성 결혼 및 트랜스젠더 권리에 반대하며, 이혼에 대해 훨씬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이 저자들을 당황시킨 거 같다. 그들은 “문화적 시간 차이(lag)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도 결국에는 성에 대한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비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들이 뭘 잘 모르는 거 같다(그게 아니라면, 알면서도 책에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성경말씀에 깊이 빠지게 될수록 경제적, 인종적 정의에 관해서는 훨씬 더 개방적이 될 수 있지만, 현대의 성 혁명에 관해서는 오히려 더 보수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뿐 아니라 이성 간의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을 착취하는 것도 반대한다.


저자들이 지적했듯이, 자유주의 주류 교파들이 성과 젠더에 대한 견해를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수십 년의 갈등이 있고 난 이후였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예를 들어 인종과 정의)은 받아들이면서 또 어떤 부분(예를 들어 성과 젠더)은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 교회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오류가 없는 말씀이라는 기독교의 역사적 믿음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성장하는 많은 교회는 여전히 성경에 대해 기독교의 역사적 이해를 지키고 있다. 무너진 주류 교회들에 비교해 그런 교회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이것은 북미에서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의 성장이 인구 성장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페리와 화이트헤드처럼 교회가 성에 관한 문제에서 조금 늦더라도 곧 현대 문화와 발을 맞추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려면, 그 전에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이 오로지 성경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교회의 근본적인 이해 자체에 지각변동에 맞먹는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경우, 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자유주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뭘 배울 수 있을까?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마지막 장에서 세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첫 번째로,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국가주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지하고 또한 종교의 장식물과 수사학을 사용하여 폭력까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 자신들을 도덕적, 종교적 상징주의로 은폐하기 위해 기독교 언어와 상징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반대자들에 대한 인내, 존중, 정중함, 표현의 자유, 토론 등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약속을 그들이 훼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를 ‘복음주의’나 ‘백인 복음주의’와 동의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하며 그렇게 하는 순간 물이 흐려진다고 지적한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모두에게서 아이디어를 끌어내고 또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이런 다양한 원인의 산물이나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저자들은 결론짓는다. 거부자들은 종종 기독교 국가주의는 복음주의와 보수주의가 합쳐진 논리적인 결실이라고 단언하지만, 저자들은 데이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다른 운동의 요소들도 신중하게 채택하는 게 사실이지만, 기독교 국가주의는 “그 자체로서 독특한 문화적 틀을 이루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반대 주장도 가능하다. 오늘날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국가주의이다. 좌파 쪽 많은 이들의 주장처럼, 복음주의자들이 모두 다 사악한 기독교 국가주의자라고(또는 그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일부까지 극단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에 대한 매혹적인 예는, 1월 6일 국회 의사당에 입성한 폭도 중 한 명인 복음주의 기독교인 마이클 스파크(Michael Sparks)이다. 2020년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적으로 소셜 미디어에 빠진 그는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극단주의자가 서로 물어뜯는 모습에 점점 더 분노를 느꼈고, 결국 자신도 기독교 국가주의자라는 ‘미디어 거품’에 빠졌다. 기독교적 믿음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만들었지만, 교회 목사와 친구들은 점점 더 분노를 키워가는 그를 향해 소셜 미디어를 제발 그만 하라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분노에 찬 언어가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지금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상태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복음주의가 어떻게 그를 국가주의자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런 그를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가려고 했던 환경도 함께 소개했다. 복음주의 신앙이 필연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세 번째로,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인구 통계학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늙은 백인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도 지적한다. “그 크기는 줄어들고 있지만 중요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저자들은 현재의 하락 추세에도 불구하고 사회 정치적 사건이 그런 추세마저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911 테러 이후 4년 동안 기독교 국가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더욱이 숫자가 줄고 있다고 인식하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더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그런 추세를 뒤집기 위해서라도 더 활동적이고 극단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기독교인을 위한 몇 가지 교훈을 더 생각해보자


첫 번째로,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와 그 유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 반드시 성경 신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로 인종적, 민족적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사랑하고 이 나라가 이룬 성취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나라가 건국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고 저지른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죄인으로 구성된 모든 국가는 어디나 과거에 저지른 큰 도덕적 잘못과 악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과거를 숨기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나가는 큰 발걸음이고,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특정한 한 나라나 인종을 통해 구속사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나라는 다 같은 수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 모든 나라(인종)가 이웃과 형제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의 한 가지 예로 갈라디아서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초청하지만, 단지 도덕주의와 종교성의 추구에는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을 참조하라. 기독교 국가주의는 법에 도덕을 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회심과 변화된 삶이다. 성경의 도덕적 비전을 반영하는 법으로 나라가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도 교회와 성경 가치를 반영한 법이 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공동의 선(common good)이라는 점에 동의할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심판한다. 야고보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돕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알려준다.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참된 구원의 믿음은 항상 사랑, 희생, 그리고 자비의 행위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한다.


두 번째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독교 국가주의가 진짜 우상숭배임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정치권을 우리의 구원자로 바라본다. 특정한 사회 정책 세트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잘못된 게 아니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이제는 아예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선택받은 백성이고 세계의 “구속자 국가”라고 가정한다. 이런 주장이 아주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생각은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소리 없는 “전제 내지 기초(givens)”가 되어 기독교 국가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로 거부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교회 내부에서 기독교 국가주의를 반대할 때 우리도 힐 목사처럼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힐 목사를 향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다”라며 부당한 낙인을 찍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때, 힐 목사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자기 변호가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말이다. 그가 세운 기독 학교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백인 기독교인을 보았을 때, 그러면서 그들이 오늘날 식으로 말해서 “그래, 너만 엄청 잘났어(super-woke)”에 해당하는 각종 욕을 쏟아놓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비방을 무시했다. 기독교와 백인이 하나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건 단지 인기가 없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무서운 공격까지 받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공격은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구세주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해야 한다.


네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영향력을 키워가는 만큼, 전도의 문이 닫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의 기풍은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또는 복음적으로 대화하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불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이렇다. “그들은 악해. 그런 인간들의 의견이 뭐가 중요해? 물론 우리를 미워하겠지. 미워하는 만큼 우리도 미워하면 돼. 걔네들이 최대한 열받을 만한 말만 골라서 하라고(Own the libs).”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바라는 전도의 동기는 기독교 국가주의에서 완전히 근절되었으며, 이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종교 운동이 아니라, 단지 종교 언어의 힘을 사용할 뿐 분명한 정치적 운동임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 오로지 말씀에만 근거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분석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도덕적 나침반을 위해 성경에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견해에서 더 “자유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서는 더 “보수적”이 된다. 그러나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일종의 윤리적 정신분열증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성경의 사회적 가르침은 매끄럽고 통일된 하나(whole)이다. 인종과 빈곤 그리고 성과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그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난하고 다른 인종과 이웃을 존중하고 오로지 이성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할 때, 그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이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속하셨는가라는 윤리적 규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적 정통을 유지하고 기독교 국가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신자의 경우에 오히려 더 많은 전선에서 공격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보다 훨씬 더 큰 외로움과 현대 문화로 인한 더 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당분간 복음주의 기독교를 백인 우월주의 및 국가주의와 동일시할 것이다. 국회의사당 폭동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복음주의적 기독교 상징과 언어가 국민의 의식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앞으로도 수년이 족히 걸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믿음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고, 따라서 복음주의가 본질적으로 결코 국가주의적,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 다른 지역에서 온 대부분의 복음주의자 친구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가 정신을 잃은 것 같냐고 묻곤 한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12절과 같은 약속의 말씀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공격적이지만 또한 매력적이고, 비방과 함께 칭찬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오로지 공격만 받거나 또는 항상 인정만 받는 기독교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말씀과 복음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원제: A Book Review on the Topic of Christian Nationalism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기독교의 역사적 정통을 유지하고 기독교 국가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신자의 경우에 오히려 더 많은 전선에서 공격받을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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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