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기준에서 바울은 모자란 선교사였을까?
by Jonathan Worthington2021-08-12

이 명령은 공동 사명이다. 왜냐하면 왕 되신 예수께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내내 흔들리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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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신다. 그건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사명을 “선교”라는 모자란 생각으로 축소한다. 


하나님의 사명은 문자 그대로 우주적 규모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마지막에 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고 나머지는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 속에 있는 미움을 없애고 있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아들의 피를 통해서 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사명


하나님의 우주적 사명의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주신 대사명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회심하도록 이끄셨고, “모든 족속(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공동 사명이다. 왜냐하면 왕 되신 예수께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내내 흔들리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동 사명을 수행한 지 몇 년 후, 바울과 바나바는 왕의 행군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일부 선교사, 교회 및 “선교” 기관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바울과 바나바의 실질적 사례


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연합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했다(행 13장). 두 번째 안식일 발표 후, 이방인(열방, ta ethne)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또 영화롭게 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과 저명 인사들이 그들을 쫓아냈다.


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왕 되신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쪽 갈라디아로 95마일(도보로 아마도 30시간 거리)을 여행하여 이고니온에 이르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 이방인(열방, ta ethne), 그리고 통치자들은 그들을 거의 돌로 쳐서 죽일 뻔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로이스,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까지 남쪽으로 20마일을 더 달려갔다(도보로 6시간 추가?). 그리고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16절)의 일부이자 리카오니아 언어(행 14:8-20)를 사용하는 미전도 종족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고니온(20마일 떨어진 장소)과 심지어 비시디아 안디옥(115마일 떨어져 있음)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의 마음을 바꿨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그의 몸을 성 밖에 내던졌다. 그러나 바울은 일어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를 통해 더 동쪽으로 전진했다. 오늘날 인기 있는 선교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작업(task)을 완료해야 했다. 그들은 이곳 갈라디아에서 이방인(열방)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베까지 70마일을 더 걸었다. 그리고 더베의 미전도 종족 가운데 “많은 제자”를 삼았다(행 14:20-21).


여기서 잠깐 멈추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빨리 읽기만 하지 이 속에 숨은 암시적이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놓친다. 사도행전 14장 21절을 보면 중요한 선교적 결정이 더베에서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과 남부 갈라디아 전역의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이제 효과적인 선교사로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당신의 성화된 상상력을 사용하여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대화를 상상해 보라(다음 대화는 현대적 표현으로 약간 바꿨다).


바나바: “글쎄, 어떻게 생각해? 시실리안 성문을 통해 남동쪽으로 우회해서 갈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소에서 일단 당신 가족을 만나고 나서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야.”


바울: “맞아. 파송한 교회에 보고도 해야하니까.”


바나바: “그래, 그러고 나서 다른 미전도 지역으로 가면 되지.”


바울: “응, 하지만… (잠시 생각)…. 여기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어. 갑바도기아 전역의 많은 미전도 국가들도 그리스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나바: “당연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왕이 주신 임무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완수해야 할까?”


바울: “흠, 작업을 완료하려면”….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그와 공동 선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 중이다)…. “알았다! 이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해!”


바나바: “아니, 돌을 맞은 거기로? 쫓겨난 거기로?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미전도 종족’이 아닌 거기로 말이야? 아멘!”


이게 당신이 예상한 결론인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메모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선교를 끝내는 것은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 종족에게 가는 것뿐이다. 


아니면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사명을 반으로 축소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거하도록 권하며,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함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그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선발했고, 기도와 금식으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행 14:21b-23)


바울이 신자들과 지역 지도자들을 더 세우고 가르치는 데 사용한 시간과 정력은 다름 아니라 그가 미전도 종족을 개종시키는 데 썼어야 할 시간과 정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한 마디로 그는 보기에 따라서 “덜 긴급한” 사역을 선택했다. 그가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데에 들인 시간 또한 새로운 영혼을 개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그 교회들을 계속해서 다시 방문하는 시간(행 16:1-5; 18:23; 19:1)도 마찬가지로 미전도 종족 개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계속해서 이미 전도한 곳에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가는 데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모든 족속을 회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를 삼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과 모든 자원을 투자했고, 그에 따라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원받은 모든 자원까지 투자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선교 전문가들은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전혀 다른 가르침, 이런 식의 충고를 했을 것이다. 


"형제 여러분, 사명(mission)은 분명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북쪽으로 향하여 갑바도기아에 있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형제여, 이제 나가서 임무(task)를 완수하세요!"


이것은 내 친구들이 선교 현장에서 실제로 받은 코칭 내용이다. 나는 너무 느리게 전도하고, 너무 비효율적으로 사역하며, 미 전도 종족을 외면한다는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선교사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려는 교회와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비록 선의라 할지라도 축소된 선교사의 사명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상처를 준다. 선교사 사역의 내구성과 지속성을 해친다. 그리고 통계 수치가 그리 나쁘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선교 파트너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지금 선교를 업무와 조언 그리고 투자라는 측면에서만 보기에 그리스도의 공동 사명을 축소한 건 아닌지, 또는 지금 축소하고 있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이루시는 우주적 화해와 평화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하나님에게 많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가? 선교는 시급한 일이다. 그렇기에 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원제: Would Paul Be Considered a Bad Missionary Toda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모든 족속을 회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를 삼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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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nathan Worthington

조나단 워싱톤(PhD, Durham University)은Training Leaders International의 부 학장이다. 저서로는 ‘바울과 필로 속의 창조(Creation in Paul and Philo)’가 있으며, 바울의 선교와 횡문화적 신학교육 등에 관한 다수의 아티클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