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의 참된 의미
by Alex Duke2021-08-11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바로 다음에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라’는 말씀이 따라오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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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도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그는 이런 트윗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리트윗하세요. 

#사랑은 사랑이다.

나는 동성 결혼에 대한 교훈이나 도덕성에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단지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한 더 큰 대화의 출발점을 삼기 위해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트윗을 언급한 것이다. 인기도 있고 트윗하기에 좋은 문장이지만, “사랑은 사랑이다”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사람이 가진 기존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은 장난감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사랑이다” 식의 조잡한 사랑의 정의는 진정성 및 자아 실현과 같은 미덕이 지배하는 오늘날 시대 정신(zeitgeist)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사랑의 중재자가 되었고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법과 제도의 가식적인 방해와 타인의 신비한 의견을 뛰어넘어 나무랄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중요한 개념을 확장시키고 또 확장시켜 완전한 주관주의로 바꾼다. 그 결과는? 진정한 의미와 무게가 사라진 사랑은 이제 훨씬 못한 무언가, 인간이 만들었기에 불안하고 심지어 변덕스러운 대체물로 채워진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고, 그럴수록 진정한 사랑에 관한 대화는 더욱 어려워졌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나쁜 거래를 했다.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정비소에 차를 맡겼지만 실상은 그만 고물차를 몰고 나오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 자신부터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틀린 점에 관해 정확하게 지적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 성경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는 다섯 가지 사실이 있다. 


1.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인식해야 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삼위일체 창조주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이런 사실을 드러내셨다. 때때로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됨과 사랑을 주시며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미움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을 위해, 특히 임박한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몇 구절 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잠시 여기서 멈추고, 당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사실, 존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상상해보라. 사람도, 장소도, 또 사물도 없다.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에 따르면, 뭔가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사랑이다. 


아들과 그 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없이는, 아버지와 그 영을 사랑하는 아들이 없이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시는 영이 없이는,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이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사랑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기초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2. 사랑이 땅으로 내려오시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하얀, 사랑의 핵 그 자체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있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메랑”이 되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하셨다. 


성경에서 사랑은 대속의 희생과 얽혀 있다. 우리는 이 연결의 정점을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발견한다. 십자가는 아들이 치른 희생의 증거이다. 빈 무덤은 아버지께서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3. 사랑은 이웃에게 퍼진다


사랑에 관한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은 사랑은 수직적이며, 이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은 실재하는 수직적 사랑의 존재에 대한 시험으로 수평적 명령(“이렇게 하라”)을 사용하신다. 즉, 수평을 통해 수직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희생적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35).


빌립보서 2장의 서두에서 바울도 같은 말을 한다.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한다. “같은 마음을 품는 것”과 “같은 사랑을 갖는 것”은 우리를 오로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킨다. 그분은 모범을 보이셨다. 사랑과 겸손을 관해서 그는 선구자이다. 계산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4. 사랑은 왕에게 순종한다


또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바로 다음에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라”는 말씀이 따라오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의 설명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속에 권위의 요소를 도입했다. 이런 사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전반과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아직까지 새 몸으로 영화롭게 되지 못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not-yet-glorified)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권위가 실종된 사랑에 대한 정의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기에 이러한 대조는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의 선하신 권위와 주권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죄라는 신용 카드를 엄청나게 쓰고 아버지가 그 빚을 갚아주기만 바라는 식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 게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와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disposition)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이루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의 말하는 요점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왜 그런 건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속 없는 내 자신의 자유에 집착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꿈꾸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인 신기루를 바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이 가혹하고 변덕스럽고 도무지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죄처럼)인지, 아니면 은혜롭고 변함없고 신뢰하는 존재(하나님처럼)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의 왕은 우리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살도록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5. 사랑은 천국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지금”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구원을 서로 상기시키고 또한 끊임없이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약속된 예수님의 재림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사랑해야 한다. 


두 번째로, 회심은 실제적이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지체없이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서로를 거룩함의 자리로 격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가 나의 죄를 놓고 나를 권면할 때, 비록 그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죄함이나 원망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비롯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권면이 비록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내 속에 자신감을 억누르며, 때로는 논쟁적으로 반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대립은 특히 비기독교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면에서 거짓 그리스도인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지옥을 예약한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이 맞을 영원한 상태에 관해 경고함과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내세움으로써 오늘도 “천국을 소망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만약에 비기독교인이 이 기사를 읽는다면, 나는 대환영이다. 그들에게 이 글이 아마도 당혹스럽고 대립적이겠지만, 그만큼 또한 솔직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까지 보기를 바란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함과 동시에 지금도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독교인을 향해서도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붙들라고 격려함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함께 기뻐하거나 또는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에 나와 있는 권면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도무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경우, 그 형제 또는 자매를 공동체에서 퇴출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흔히들 권징이라고 부르는 이런 과정조차도 사실은 천국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다.  


웅덩이와 바다


이 세상과 미국의 전 대통령이 말하는 사랑이 틀린 건 아니다. 사랑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자기 암시적인 문장이 말하는 사랑의 진짜 의미는 인간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기원,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아들의 희생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이 조건적이 아니며 강권적인(authoritative) 이유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한 성령을 통해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우리에게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즉 신자와 비신자, 그리고 나아가서 죄에 빠져있다고 고백하는 신자까지도 사랑하는 방식을 바꾼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우리의 기대를 높이고 또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다. 이 세상은 아직 웅덩이에서 뒹굴고 있지만, 우리는 저 바다를 그려가고 있다. 




원제: Love Is Not Whatever You Want It to B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성경은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우리의 기대를 높이고 또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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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lex Duke

알렉스 듀크는 9Marks의 총괄 에디터이다. 그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ird Avenue Baptist Church에서 청소년 담당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