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이 정리해 준 복음 전파의 의미
by J. I. Packer2021-07-19

옛 복음이 전파한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하나님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는(현대의 거짓말) 게 아니었다. 옛 복음은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동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동정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동정이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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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 I. 패커의 유명한 에세이’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부 


오웬의 성경신학적 탐구와 칼빈주의’에서 이어집니다.



복음 전파가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다.


첫 번째로, 우리는 오웬의 옛 복음이 결코 현대의 복음보다 덜 완전하거나 덜 자유로운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충분한 믿음의 근거(그리스도의 충분함과 하나님의 약속)와 믿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동기(죄인의 필요와 구속주의 초대라고 볼 수 있는 창조주의 명령)를 제시한다. 새 복음은 여기에서 보편적 구속을 주장함으로써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확실히 옛 복음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체질상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는, 그런 식의 값싼 감상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또한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받고 당황하는 굴욕적인 구세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식의 비참한 호소에도 탐닉하지 않는다.


옛 복음 속에는 현대 강단이 전파하는 가엾은 구세주와 한심한 하나님이 존재한 적이 없다. 옛 복음이 전파한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하나님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는(현대의 거짓말) 게 아니었다. 옛 복음은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동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동정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동정이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가르쳤다. 옛 복음은 스스로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위엄과 주권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시에 그의 자유로운 전능을 가리는 모든 표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옛 복음의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는 것을 의미할까? 전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은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비를 제대로 인식했기에 오히려 새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자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초대는 모든 죄인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의 본성의 필연성, 따라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굳이 인간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타락한 인류를 얼마든지 자비로움 없이 영원히 추방하셨을 수도 있는 거룩하신 창조주께서 실제로 그들 중 일부를 구속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아들이 기꺼이 죽음을 겪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불경건한 사람을 향해 회개하라고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선택하라는 자비로운 초대의 말씀을 믿으라는 명령을 촉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옛 복음의 전파가 중심으로 삼은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기에, 모든 것이 훌륭하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놀라운 것은 복음 진리가 전파되는 모든 거룩한 땅에서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계신 ‘주 그리스도’(오웬이 부르기를 좋아하는 형태처럼)가 죄인들을 향해 내려와서 영혼의 안식을 찾으라며 반복해서 거저 주시는 초청이다. 다른 이도 아닌 전능하신 왕이 이 초대를 주시다는 것이 바로 이 초대가 영광스런 이유이며, 그가 여전히 죄인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주요 부분이다. 그리고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은 복음 사역의 영광이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죄인에게 개인적으로 왕의 초청을 전하고 그들 모두를 불러서 돌이켜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 그가 받은 임무이다. 오웬 자신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구절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명, 구원, 자비, 은혜, 평화,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에게 나아오도록 당신을 초대하고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겸손과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초대와 부름에 대한 수많은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길을 잃었으나 확신을 갖게 된 죄인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적합하다는 축복된 격려로도 가득합니다. … 이런 말씀의 선언과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죄인 앞에 서서 그들을 부르고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의 일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멸망하겠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느냐? 다가오는 진노의 날에 네 마음이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손이 감히 강할 수 있겠느냐? … 나를 보고 구원을 받으라.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의 모든 죄와 슬픔과 두려움과 짐을 덜어 주고 너희 영혼에 안식을 주리라. 자, 내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미루는 모든 일을, 모든 지연을 제쳐두라. 더 이상 나를 거부하지 마라. 영원이 지금 문 앞에 있으니, 마치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멸망할 것처럼 나를 미워하지 마라.


이와 비슷하게 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영혼에 대하여 끊임없이 선언하고 선포하고 간청하고 촉구하십니다. … 마치 그가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가운데 서서, 여러분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 그는 복음의 일꾼들을 세워 여러분 앞에 나타나게 하시고 자기를 대신하여 여러분을 대하게 하시며 자기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진 초청장을 그 분이 주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고후 19, 20).

이러한 초대는 보편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초대하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초대는 이론이 아닌 진짜이다. 그리스도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치고, 진실로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구원자가 되신다. 속죄의 범위에 관한 문제는 전도 설교에 필요하지 않다. 전해야 할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주권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이 순간 죄인들을 당신께로 거저 초청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령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평화를 약속하신다.

이러한 초대는 실로 놀랍도록 은혜롭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신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이런 초대를 멸시하고 거부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신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초대하신다. “나에게로 오라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그의 말씀은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면 이 세상에서 쉼 없이 전파되어야 한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든 백성의 구원을 보장한 그분은 완전한 구세주로서 세계 도처에서 선포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그를 믿도록 초대되고 또 강권함을 받고 있다. 옛 복음의 전도는 바로 이런 이 세 가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복음주의적 설교를 알미니안주의자의 설교와 비교해서 빈약하고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가정이다. 번연(John Bunyan)의 설교(오웬이 특히 좋아한 설교)나 휫필드 또는 스펄전과 같은 옛 복음의 가치를 아는 설교자들의 설교 본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그들이 구세주를 내세우고 있고, 또한 죄인들을 향해 그에게로 나오라고, 소위 말하는 개신교 강단의 설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과 강렬함 그리고 역동성을 가지고 초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들의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통해 상한 마음까지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완고한 마음을 녹이는 따뜻함까지 겸비해 오늘날 독자까지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니라 설교 메시지의 핵심에 은혜가 거저라는 사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굳이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선택을 하실 필요가 없었고, 또한 그의 아들을 죽게 하실 이유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그 신성한 사랑의 차원이 가지는 가치의 채 절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대속적 저주를 짊어지실 필요도 없었고, 그가 지금도 행하시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죄인들을 초대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온전히 그분의 자유로운 목적에서 비롯한 당신의 은혜를 통해서 이런 역사를 이루신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옛 복음의 설교자들은 그런 사실을 강조했고, 바로 그런 강조가 그들의 복음적 설교를 지금까지도 다른 설교와 구분되는 클래식으로 만든 것이다.


피상적이고 또 깊은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학을 소유한 다른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복음 설교에서 중점을 두는 사실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나 평화 또는 능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함”으로써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는 방법론이다. 비록 이러한 유형의 전도가 너무 인간 중심적이고 경건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빈약한 설교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와 같은 이에게 남겨진 것은 칼빈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값없는 사랑, 인간이 되신 겸손과 오래 참음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교화적인 방법이다.


죄인을 향한 복음 초대에서 핵심은 이것이다. 은혜가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자비의 전능성에 온전히 무게를 두는 것 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방법이 없으며, 또한 그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믿음을 일깨우고 확증하는 방법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때때로 옛 복음을 선포한 설교자들만이 마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계시를 제대로 선포할 수 있는 지위를 가졌던 유일한 사람들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번째로 옛 복음은 새 복음이 잃고 있는 가치를 보호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편적 구속과 보편적 신성한 구원의 목적을 주장하는 새 복음이 아버지와 아들이 구원에 있어서 주권자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은혜와 십자가를 값싸게 만들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기에 새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할 수 있거나 또는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미 다 하셨고, 이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지 여부는 결국 각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는 두 가지 불행한 결과가 담겨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가 가지는 의미를 오해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복음을 전능한 왕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인내의 표현이 아니라 무력한 욕망이 표출하는 한심한 탄원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에 즉위하신 주님이 갑자기 나약하고 헛된 모습으로 변하더니 결국은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열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의 문을 쓸쓸히 두드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신약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수치스러운 불명예이다.


두 번째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는 사실상 중요한 결정에 관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부인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하고,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결론을 죄가 이끄는 대로 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나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고, 나의 운명과 내 영혼의 지배자도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와 맺는 종교적 관계의 기초 자체를 훼손한다. 그렇기에 새 복음을 통해서 개종한 사람들이 특히나 불경하고 비종교적이라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 복음의 가르침이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복음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전혀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때 옛 복음은 새 복음이 특히 무시하고 있는 지점, 즉 죄인들이 마음의 회복 없이는 율법에 순종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선언할 때, 옛 복음은 그리스도를 회심의 저자이자 주요한 대리인으로 선포한다. 또한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분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따라서 옛 복음은 메시지를 적용할 때 믿음이 사람의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믿음이 결코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주셔야 한다는 사실도 같이 강조한다. 옛 복음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끌지 않으시면 아예 올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선언한다. 따라서 옛 복음은 복음을 적용할 때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고 죄인들에게 그들의 구원이 그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을 확신시키며, 그들의 의로움도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럼에도 죄인들이 절망에 빠지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 주권적인 구주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달려있음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복음의 설교자가 현재 유행하는 구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단하라”는 식으로 복음을 적용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 구호는 잘못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호는 구원을 마치 선거에 출마한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독립적인 유권자의 판단만을 기다라는 후보자처럼 오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투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구세주로 임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설교자들이 그를 대신하여 운동을 하도록 방치하는 수동적인 존재도 아니시다. 전도를 이런 식으로, 일종의 선거운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구호는 회개와 믿음에 필수적인 바로 그것, 즉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자기 부인을 모호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이라는 게 도대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인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인지 또는 일종의 자기 노력을 말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이 구호가 훨씬 쉬운 것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복음이 실제로 죄인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옛 복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추가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독선과 자신감을 버리고 용서와 평화를 위해 전적으로 그에게 당신 자신을 던지라. 또한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태생적인 적대감과 반항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이 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옛 복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 말하고, 또 그리스도께 부르짖으라. 당신의 죄와 회개하지 않은 것과, 또 불신앙을 고백하고 그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라. 참된 회개와 확고한 믿음으로 새 마음을 달라고 구하라.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당신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기록해 달라고 간구하고, 이후로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에게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 그를 신뢰하고 더 철저하게 돌이키고 또 신뢰하는 은혜를 위해 기도하라. 그분께로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동시에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은혜의 수단을 기대하며 또 활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읽고, 듣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며, 자신이 참으로 변화된 존재이고, 회개한 신자이며, 주님이 원하는 새 마음이 내 속에 담겼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알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라. 이 조언의 강조점은 무엇보다 첫 번째 단계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불러야 할 필요성에 있다.


양심이 당신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허황된 바람을 갖지 말게 하라.
그분이 요구하는 전부는
당신이 그분에 대한 필요를 더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아졌다고 생각할 때까지 행동을 미뤄서는 안 된다. 정직하게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당신을 더 낫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바치라. 그리고 성경이 약속한 대로 그의 빛이 당신의 영혼에 떠오를 때까지 그를 기다리라.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것 보다 더 못한 것은 복음에 대한 불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옛 복음이 청중을 부르는 영혼의 훈련이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그들의 외침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성경의 초청이 제대로 설명되고 적용될 때, 사실상 설교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확신 속에서 옛 복음이 선포될 때, 결코 복음은 수동적으로 앉아서 사람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대신 전능하신 분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또한 그의 백성이 자신을 믿도록 강하게 인도하신다. 그러나 새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가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사람만 움직이면 된다는 식으로, 따라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과업으로 종종 묘사된다. 그러나 옛 복음을 전파하는 과업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람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눈앞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선포하는 전능하신 구세주가 지금 그들의 설교와 심방 등을 통해 자비로 그들을 자신에게 이끄느라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웬이 우리에게 전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옛 복음이다. 곧 믿음과 구원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이다. 그것은 오웬의 원칙에 따라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한 복음이지만, 그 단맛을 맛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복음을 찾지 않게 된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문제에 있어서 예레미야의 말은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오웬이 우리에게 금지한 것처럼, 유행하는 현대의 대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금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나,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할 말이 여전히 많이 남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론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다. 앞선 내용은 단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대한 오웬의 분석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오웬의 작업에 대한 몇 마디


논문 자체에 대한 몇 가지 설명만 추가하도록 하자. 이것은 오웬의 두 번째 주요 작품이자 그의 첫 번째 걸작이다(오웬이 26세였을 때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전작인 ‘알미니안주의 연구(A Display of Arminianism)’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이라기 보다는 유능한 견습 작업에 가깝다).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은 상세한 설명과 면밀한 논증으로 구성된 견고한 책이며 오웬이 강조했듯이 독자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대충 봐서는 결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독자들이여…. 만약에 당신이 이 가식의 시대에 단지 간판이나 제목을 응시하는 사람이고 그냥 극장에 가는 것처럼 편하게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한다면, 그냥 나가라. 가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오락거리를 찾아라. 안녕!!!”) 오웬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이야말로 실로 열심히 노력한 각고의 산물이기에 독자에게 열심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칠 년이 넘는 산고의 노력 끝에 나온 결과물… 이 주제에 관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내가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숙독한 결과,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출판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쓴 내용에 어떤 의미로 볼 때 결말이 붙어 있다는 사실도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성공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쓴 내용에 대한 확실한 답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살지 않겠다고 나는 확고하게 결심했다.”) 시간은 그의 낙관주의를 정당화했다.


오웬의 적들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보편적 구속이라는 주제가 가진 세 가지 변형에 반대하여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지적한대로 전통적인 알미니안주의의 주장, 소뮈르(Saumur)의 신학 교수진(대표적인 주창자의 이름을 따라 아미달리즘(Amyraldism)으로 알려진 입장) 그리고 이스트 앵글리아의 평신도 신학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 중 두 번째는 소뮈르의 스코틀랜드 교수인 존 카메론(John Cameron)이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두 제자인 아미라우트(Amyraut, Amyraldus)와 테스타드(Testard)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나아가서 아미라우트, 달레(Daillé) 그리고 블로델(Blondel)이 한 편이 되어서 리베트(Rivet), 쉬판하임(Spanheim) 및 마레시우스(Des Maret, Maresius)와 다투는 장기간의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소뫼르의 입장은 영국의 개혁파 신도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으며, (특히) 어셔(Usher) 주교와 데버넌트(Davenant) 그리고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 의해 수정된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웬이 이 글을 썼을 당시 이들 중 그 누구도 인쇄물을 옹호하지 않았다.

소뫼르의 입장에 관한 굴드(Goold)의 설명을 인용한다.


하나님의 목적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구원의 누림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소뫼르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구원을 주신다는 선행 작정을 주장하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의 체계는 가설적 보편주의라고 불렸다. 소뫼르파와 엄격한 알미니안 이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자에 의해서 주장되는 택함 받아 영적 회복을 이룬 자들의 확실한 구원 보장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속죄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보편성을 부여하고, 또한 그 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조건에서 모든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범위 내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다 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굴드는 이렇게 계속한다.


오웬의 독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 그가 조건부 시스템을 논박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나 독특한 예리함과 반복적인 진술을 하는 이유를. … 그런 주장은 그럴듯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지식인들을 옹호자로 만들었고 또한 외국 교회들도 지지를 보냈다. 더불어 토마스 모어까지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토마스 에드워즈(Thomas Edwards)는 모어를 “링컨셔, 노퍽, 케임브리지셔에 많은 상처를 준 위대한 종파, 보스톤과 (왕의) 린, 심지어 네덜란드에서까지 유명했으며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백스터의 설명은 조금 더 친절하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위스비치와 린의 직조공.” (물론 모어의 구속 교리는 실질적으로 백스터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모어의 능력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모어의 책,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보편성(The Universality of God’s Free Grace in Christ to Mankind)은 1646년에 나왔고(굴드가 말한 것처럼 1643년이 아님), 당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삼 년 안에 그 책에 대한 전체적 또는 부분적인 논쟁 내지 반박을 가하는 비중있는 책이 네 권이나 발간되었다. 토마스 위필드(Thomas Whitfield)가 1646년에 쓴, ‘토마스 모어를 ... 반박함(A Refutation ... of Thomas More), 존 스탈함(John Stalham)이 1647년에 발간한 ‘속죄 변증(Vindiciae Redemptionis)’ 그리고 오바댜 호웨(Obadiah Howe)가 1648년에 쓴, ‘보편주의자 심문받고 유죄 판결 받다(The Universalist Examined and Convicted)’,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해에 출간된 오웬의 책이다.


모어의 설명에는 본질적인 중요성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오웬은 그 책을 당시 영어로 나온 보편적 구속에 대한 가장 완전한 진술로 선택하고 무자비하게 박살낸다. 그러나 현대 독자는 오로지 무어를 논박하기 위해 쓰여진 부분들(I. viii, 그리고 II. iii. IV. Vi의 마지막 페이지)은 건너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스타일에 대해 한마디 할 필요가 있겠다. 오웬의 작품이 무겁고 읽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모호한 배열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의 느릿느릿한 문학적 걸음걸이이다. “오웬은 코끼리의 우아함과 단단한 발걸음으로, 때로는 보기 흉한 움직임으로 그것(주제)을 통과합니다.”라고 톰슨은 말한다. 이건 아주 좋게 말한 것이다. 오웬의 산문 대부분은 키케로가 라틴어로 쓴 생각의 일부를 대충 번역한 내용처럼 읽힌다. 그의 글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서투른 위엄이 서려있다. 그런 위엄은 스톤헨지(Stonehenge)와 같은 고대 유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문장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두세 번 반복해서 문장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노력은 그의 논증을 따라가는 과정을 훨씬 더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웬의 어려운 부분이 대개 소리 내서 읽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모호한 요소는 성경 주해자로서 오웬의 엄격함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부드럽게 주제로 끌어들이는 광범위한 서론과 흩어져 있는 점들을 작은 공간으로 모으는 포괄적인 요약을 아주 경멸한다. 그의 머리 속에는 분명한 전체 디자인이 들어 있으며, 그는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기대한다. 그의 장 구분은 결코 담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신뢰할만한 조력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제의 변경은 일반적으로 장 구분으로 표시되지만 오웬은 종종 전혀 생각의 중단을 고려하지 않고 새 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문학적 비율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다. 주제에 부여되는 공간은 상대적 중요성보다는 본질적인 복잡성에 의해 결정되며,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독자 스스로 주목함으로써 기본과 부차적인 문제가 해결되도록 남겨 둔다. 따라서 독자는 책을 공부할 때 연필과 종이를 사용해서 논증의 진행 상황을 그때 그때 기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추가된 하위 분석이 독자로 하여금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길 바란다.


오웬의 작품을 읽어서 얻는 보상

오웬을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오웬 공부와 관련해 투자하는 모든 노동의 가치를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싶다.


(1) “독자에게”라는 서신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가 오웬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와 그 이유를 짧은 나침반의 형태로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2) 논문 전체를 있는 순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며, 오웬이 지향하는 입장의 성경적 토대를 드러내는 1부와 2부의 내용을 마스터하기 전에 3부와 4부로 건너뛰지 않아야 한다.
(3) 단 한 번 읽어서 이 방대한 저작물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제대로 그 가치를 알려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원제: J. I. Packer’s Famous Essay on Christ’s Deat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오웬이 우리에게 전파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옛 복음이다. 곧 믿음과 구원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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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 I. Packer

 J. I. 패커(1926-2020)는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스테디셀러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2020년 7월 17일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