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해체, 그리고 인내하는 신앙
by Jay Kim2021-05-28

교회 역사 초창기부터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의심 속에서도 또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헌신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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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제이 킴(Jay Y. Kim)의 저서 ‘아날로그 그리스도인(Analog Christian)에서 발췌한 것이다. 킴은 또한 TGC가 최근에 해체에 관해 낸 새 책인 ‘믿음을 버리기 전에: 교회 속 의심을 해체하기(Before You Lose Your Faith: Deconstructing Doubt in the Church)’에도 글을 기고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종이접기 예술가 중 한 명인 사토시 카미야(Satoshi Kamiya)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용을 접은 종이 예술 Ryujin 3.5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종이접기 예술가들은 때때로 완성된 작품의 접힌 선 모두를 담은 상세한 다이어그램인 주름 패턴을 공유하는데, 다음 사진이 바로 사토시가 Ryujin 3.5에 사용한 주름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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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종이접기에는 절개, 즉 컷이 없다. Ryujin 3.5도 마찬가지다. 전체 작품은 크고 조금도 변형되지 않은 하나의 큰 종이다. 유튜브에 있는 이 종이접기 과정을 담은 가이드 동영상은 길이가 무려 12시간이다. 아무리 고도로 숙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종이접기 예술가라고 해도 이것을 완성하는 데는 몇 주, 심지어 몇 달이 족히 걸린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인내심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건지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세심한 배려, 헌신 및 기술을 적용할 때, 단지 한 장의 종이를 통해서 그 종이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전달할 수 있는 모양과 이야기는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은 완성된 Ryujin 3.5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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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간단하게 시작한다. 복음 이야기를 믿고 받아들이고 나서 조금씩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워간다. 신앙의 초창기는 종이 비행기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그러나 삶이 진행됨에 따라 신앙 속에서 잡혀가는 주름 패턴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성경과 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이 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믿음을 탐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끼면서 좌절감으로 인해 우리는 종이를 구겨버리고 더 이상 접는 것을 중단한다. 


이런 과정을 나는 공감할 수 있다. 대학 시절 초반에 나는 의심과 해체라는 과정을 지나 결국 탈회심(deconversion)까지 경험했다. 내가 어렸을 때 소중히 간직한 성경 이야기와 십대 중고등부 시절의 신앙 추억은 복잡한 내 질문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다. 주름 패턴이 내 시야를 흐리기 시작했고 나는 믿음을 완전히 구겨버리고 포기했다. 


그러나 의심과 해체가 반드시 신앙의 적이 될 필요는 없다.


의심 가운데 신실함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잘 알고 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6–20).

그런데 최근까지도 나는 이 이야기 속 핵심 부분을 간과했다. 남은 열한 명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예수님 주위에 모였을 때,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몇이 의심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의심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사명을 주셨다. 역사에 따르면 이 열한 명 모두가 다 복음에 헌신했고 교회 설립을 도왔다. 의심한 제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들 모두가 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도 질문은 계속되었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 중에서도 어떤 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셨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찰스 스펄젼, 그리고 C. S. 루이스 같은 신앙의 거인들도 의심의 시간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심각한 의심까지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을 의심했던 제자들과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의심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인내다. 그들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해체했다고 해서 그 신앙을 비난하지도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았다. 교회 역사 초창기부터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의심 속에서도 또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헌신을 지켜냈다. 


이것은 신앙과의 불협화음이 시작되자마자 신앙을 떠나는 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해체 이야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인내하는 신앙


앨런 크레이더(Alan Kreider)는 그의 저서 ‘초대 교회가 보여준 인내 속 숙성의 과정’(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제자도에 대한 느리면서도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 신앙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는 것은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교리 교육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인은 전도에 대한 매력적 접근보다는 의도적으로 엄격한 제자도를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서두르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그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다고 내가 갑작스럽고 급진적인 회심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 어머니의 신앙은 1981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심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인내를 가지고 충실하게 예수님께 헌신했기에, 내 어머니는 현재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회심은 즉각적이었지만 그녀 안에서 신앙이 형성되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오늘날 해체 이야기에서 눈에 띄게 누락된 인내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내 어머니가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앙이 약한지 강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과연 우리의 신앙이 인내하는 신앙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되어야 한다. 인내하는 신앙은 기복과 변덕의 계절을 견딜 수 있지만 인내가 없는 신앙은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의 부족한 인내심은 즉각적인 만족을 유도하는 만연한 소비주의뿐 아니라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낸 감각 충족에 치중하는 미디어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것이기도 한다. 한때 아주 중요하던 것이 잠시 후 놀라울 정도로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는 시대다. 


짧은 시간조차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오늘날 문화는 느리고 인내심 가진 사람보다는 강렬하고 화끈한 사람을 선호한다. 새로움에 중독된 우리는 오래된 것을 지겨워하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선호하며 거기에 높은 가치를 둔다. 스워보다(A. J. Swoboda)는 “이제는 새로운 것이 도착하는 순간 성숙한 것이 되고 곧 뒤처진 것이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보다 중요해졌다. 그리고 혁신은 이제 과거와의 연속성보다 중요해졌다. 


오랜 역사에 걸쳐 만들어진 진리는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가는 연대기적 속물 세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느린 성장이 열매를 맺는다


신앙에 있어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이런 저런 조류를 따르는 대신, 인내심을 소중히 여기면 어떨까? 질문과 의심의 주름 패턴에 압도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호흡과 깊은 기도다. 우리를 천천히 성장시키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이를 악물고 좀 더 이 신앙 속에 머무르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해체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심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양육하도록 부름받은 사역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포기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어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을 목양하고 있다면, 인내를 가지라. 복잡한 질문에 대한 빠른 답변 또는 진지한 의심을 사소하게 치부하게 되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만나게 된다. 천천히 가라. 그리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당신과 함께 천천히 가자고 초대하라. 


우리집 뒷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상추, 무, 파가 비교적 빠르고 쉽게 자라는 반면, 바질과 들깨의 경우는 키우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식물을 키우는 데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주고, 관찰하고, 그러면서 기다리는 중에 조용한 기쁨을 발견한다. 원예는 즉각적인 결과와 관련이 없다. ‘빨리빨리’는 땀을 흘려야 하는 흙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말이다. 


신앙과 의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여기에서 ‘거한다’라는 단어는 ‘거주지’의 동사 형태인 그리스어 메노(menō)이다. 그것은 환대와 은혜 속에서 특정 장소에서 보내는 장기 체류를 의미한다. 


심지어 해체를 통해서조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하고 예수님에게서 끝난다. 그와 함께 머물며 그가 주시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질문과 불확실성, 혼란과 의심을 처리하고도 남을 충분한 공간이 있다.




원제: Doubt, Deconstruction, and Patient Fait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인내하는 신앙은 기복과 변덕의 계절을 견딜 수 있지만 인내가 없는 신앙은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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