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by 김형익2021-05-09

가정에서 복음을 경험케 만드는 것은 은혜다. … 은혜는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설정하는 모든 조건을 무너뜨린다. 그 은혜가 흘러나오는 원천은 복음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관계 속에서 경험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역동성은 우리 머릿속에, 혹은 신자 개개인의 내면의 변화로 제한될 수 없다. 복음이 신자 안에서 만들어내는 변화는 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복음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관계의 변화를 만든다. 그리고 복음은 음녀 같은 존재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뿐인가? 십자가의 복음은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가 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다(엡 2:13-19). 복음은 이렇게 관계를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가진다.


신자가 관계 속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일차적 장소는 가정이다.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복음은 가정 안에서 내가 맺는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복음은 그 관계 맺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는 과거에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교회에 충성 봉사하느라 이후부터는 남편이나 자식들을 소홀하게 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들의 삶이 가정에 매몰되던 시절, 복음은 육아 스트레스와 가정이라는 환경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한 인격체로서의 존재감을 발견하는 경험의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이와 함께, 1970년대를 전후한 한국 교회는 성화와 성숙이라는 주제를 균형있게 가르치기보다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구원에 더 몰두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은 점차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신자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성화와 성숙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21세기의 20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선교 150년을 향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 영역은 불모지대인 듯 싶다.


복음은 먼저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서 경험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온전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율법주의자 아빠와 엄마, 율법주의자 남편과 아내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부모나 배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관계 속에서 경험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복음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복음이 경험되지 않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편이 좋겠다. 그것은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다. 부부 관계든 부모 자녀 관계든 율법주의가 관계의 기초가 되면, 그것은 상대방을 향한 요구와 그 요구를 만족시킨 결과, 그리고 거기에 주어지는 상벌의 개념에 기초하는 조건적 관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것은 엄격함의 기운과 조건의 문화를 촉진한다. 여기서는 ‘자격’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너는 이 식탁에 앉아 먹을 자격이 있어.” “당신은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대다수 평범한 가정이 경험하는 모습일지 모른다.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나의 태도는 그가 내게 보여준 태도에 대한 결과이고 반응이다. “네가 내 요구대로 해주면, 나도 네게 이것을 줄 수 있어.”라는 말은 율법주의적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대개는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방식으로 생각과 반응이 작동한다.) 부부 관계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다. 관계는 조건적이고, 내가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것이 관계적 행동의 동기로 작동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고, 아빠의 인정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아내, 아내의 인정을 구하는 남편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이런 관계들 속에서는 설령 자신이 원하는 인정과 사랑을 얻어낸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언제나 나 하기에 달린 것이고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늘 불안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관계 속에서 복음이 경험되는 가정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가정에서 경험하던 이런 관계의 패턴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가정에서 복음을 경험케 만드는 것은 은혜다. 어제 내가 아내에게 준 선물은 오늘 내가 아내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기게 하지 않는다. 내가 어제 좋은 성적을 얻었기 때문에, 오늘 나는 부모 앞에서 더 나은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설정하는 모든 조건을 무너뜨린다. 그 은혜가 흘러나오는 원천은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내게 없음을 복음은 알게 해준다. 모든 것이 넘치는 하나님 은혜다. 은혜는 살게 하는 힘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게 하는 동력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언제나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알게 하시기에, 나는 그 과분한 은혜 안에서 만족하고 내게 주신 소중한 관계들 속에서 은혜를 베푸는 존재로 살고 싶어진다. 복음의 은혜 안에는 이런 힘이 있기에, 그 은혜는 은혜를 받은 신자를 통해서 그의 가까운 관계들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은혜는 소중한 배우자에게,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게 조건 없는 은혜를 베풀게 한다. 내가 부모와 배우자로부터 받은 게 많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내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고 내가 그 은혜와 다함없는 사랑에 만족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복음의 은혜는 배우자의 인정이나 부모의 인정, 자녀의 존경이라는 마음의 우상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어서, 조건에 매여 살거나 행동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성경이 가르치는 관계의 대원리는 이렇다. 먼저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심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엡 5:25-27). 그 기준은 주 예수님이고 그 목표는 무한 사랑, 무한 책임이다. 아내는 어떤가?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낮추사 성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 같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듣는다(엡 5:22-24; 빌 2:6-8). 성자 하나님이 그 기준이다. 그래서 이것은 복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명령이고 원리다.


성경이 가르치는 관계의 대원리는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행하셨고 또 행하시는 것처럼 부모는 자녀를 대하고 양육해야 한다.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한다(엡 6:4). 부모된 우리는 자녀를 노엽게 한 적이 몇 번이던가? 성경이 이렇게 명하는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노엽게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복음 안에서 (또는 복음의 렌즈를 통해서)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고 본질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대상으로 누리지 못하는 신자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흘러갈 수 있는 은혜는 없다. 믿는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을 받는다(엡 6:1-2).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서 만족하기에, 자녀된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듯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다.


성경의 대원리라고 해서 은혜 받은 신자라면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앙적 자기 부인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부모로서 자녀에게 분노를 쏟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신자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신자의 삶은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실패의 지점에서 용서라는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라고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서 우리는 매일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을 경험해야 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복음이 관계 속에서 가장 짜릿하게 경험되는 순간이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가정에서, 부부 간에 용서를 구하고 받는 것은 그리 익숙한 일이 아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있더라도,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부모를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이 모든 전형적인 관계를 뒤집는 힘이 있다.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관계에서 실패했을 때, 신자인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신자는 날마다 가정에서도 그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경험되는 복음의 은혜는 우리의 가정을 복음으로 견고하게 세워가게 될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들어도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의 가정에서 살아간다면, 이 환경은 생각보다 복음 안에서의 성장을 심하게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면, 복음이 경험되는 관계의 가정은 새사람의 성화와 성숙을 더욱 힘있게 결실하게 하는 최적의 환경이 될 수 있다.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서 우리는 매일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을 경험해야 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복음이 관계 속에서 가장 짜릿하게 경험되는 순간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