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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놀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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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형익  /  작성일 202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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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Wesley Balten on Unsplash

인간이 배운 지식, 인간이 쌓아 올린 교양과 일정 기간 동안 보여주던 도덕성 그리고 아무리 잘 다듬어진 성품이라도 그것들을 가지고 죄로 인한 자신의 부패성을 제거하거나 씻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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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놀랄 일이 가득하다. 매일 전해지는 크고 작은 뉴스들은 정말 우리를 많이 놀라게 한다. 어쩌면 너무 많이 놀라서 놀람둔감증이라는 자기보호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30세 이상이 된 사람들 대부분은 20년 전인 2001년 9월 11일의 911 테러 뉴스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벌써 두 달 동안 미얀마의 쿠데타 세력에 의해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한다. 이 중에는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비슷한 사건의 뉴스들도 있다. 유아 학대 사건이 그중 하나인데, 그 부모들의 비정함과 폭력성에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뿐인가? 전도유망하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던 정치인들의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 뉴스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사건과 뉴스를 접할 때, 놀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거듭되는 실망감을 느끼곤 한다.


연초에는 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인 장혜영 씨에 대한 당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사건 이후 장 의원이 밝힌 입장문의 한 부분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하고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출처: 중앙일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 성추행 드러낸 장혜영의 용기).


이런 솔직한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너무나 많은 정치인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이 가진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의 유능함이나 교양과 상관없이 성추행 관련 사건들을 터뜨리지 않았는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도 없다. 당장 서울과 부산, 우리나라 제1의 도시와 제2의 도시가 보궐선거로 시끌벅적한 것도 바로 그 종류의 사건들 때문이 아닌가? 또 이런 문제가 비단 정치인들에게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니다. 대학 교수, 학교 교사, ‘심지어’라고 말하기도 미안할 만큼, 목사들에게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고 있으니 말이다. 두 해 전부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N번방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일에 연루된 사람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소위 ‘멀쩡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랬을거야”라고 주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장 의원이 물은 대로, 그들 다수는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 유명 정치인이고, 대학 교수이며 목사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놀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그들은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를 물었다. 뉴스기사에서 그녀의 질문을 읽었을 때,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이 그토록 빈번하게 동일한 일에서 부끄럽고 참혹한 실패를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진작에 물었어야 하는 질문을 그녀가 정직하게 던졌구나 하고 느꼈다. 정말 솔직하고 진지한 질문이 아닌가?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런 정치인, 교수, 교사, 목사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터지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고,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종류의 뉴스를 보면서 마치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는 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놀라서도 안 된다. 죄의 유혹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야 어찌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들 앞에서, 마치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놀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보이는 세상의 모습에 놀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아담의 범죄가 온 인류에게 미친다고 말하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인간이 배운 지식, 인간이 쌓아 올린 교양과 일정 기간 동안 보여주던 도덕성 그리고 아무리 잘 다듬어진 성품이라도 그것들을 가지고 죄로 인한 자신의 부패성을 제거하거나 씻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죄책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죄로 말미암은 오염, 부패한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패한 죄의 본성은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 일생에 걸쳐 거룩함을 입어가게 된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범죄 사건을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다윗도 넘어졌다. 그러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다(고전 10:12). 그래서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어떤 성인군자가 성추행을 범했다는 뉴스를 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신자는 감당할 수 없는 지나친 기대를 사람에게 두지도 않는다.


이제 다시 그녀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그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그녀가 찾기를 원하는 답은 무엇이겠는가? 성경을 떠나서 우리는 그 답을 얻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내면까지 다 그럴듯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인간의 실존이고 딜레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 눈앞의 여성뿐 아니라 누구를 향해서든지 그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는 장치는 풀리고 만다. 더구나 눈앞의 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위, 교양, 체면이라는, 어느 정도의 제어장치를 작동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은밀한 자리에서까지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비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있고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느낄지라도, 눈앞의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즐거워할 때’ 말이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이 로마서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 세상은 결코 이 답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 그리고 죄가 인간에게 미친 부패성—죄의 오염—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특히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범하는 사건들을 들을 때에도 놀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죄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차별 없는 사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사회,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하지만, 언제나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에, 예루살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했던 말씀에 그 이유가 담겨져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2:19, 17:9).”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있고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느낄지라도 눈앞의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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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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