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우리가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by Dustin Messer2018-11-19

악의 문제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에게 도전거리였다. 모든 이를 사랑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선한 피조물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제안은 ‘미술관에 가라’는 것이다.


미술은 늘 영성 형성과 교회 갱신의 주요 열쇠처럼 여겨졌다. 미술은 더 높이, 더 깊이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캔버스나 찰흙처럼 일상적인 사물에서 초월성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경험은 악의 영향력을 경험할 때 느끼는 딜레마와 비슷한 딜레마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반대로 선(善)과 질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묻게 한다. 분명 우리는 초월적 기쁨의 순간에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위기의 순간에서도 세계의 추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고통의 문제를 우리에게 준비시키는 일이다.

 

초월하여 보기


위대한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레오나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그 사실을 아름답게 적고 있다.


“베토벤은 놀라운 정확성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정확성 말이다. 음악은 진정한 그 무엇, 하늘에서 온 어떤 것, 우리가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힘, 혹은 이 세상에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자체의 질서를 따르며 일관되게 진행되는 어떤 흐름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으며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에서 피조물은 성스럽다. 그것은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창조의 심포니에서 질서와 의미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비극의 한 가운데서 고통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음악, 그림, 조각을 감상할 때도 그 질서와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예술은 현재를 넘어서 무한성을 보도록, 창조물 그 자체를 넘어서 창조자 그분 자신을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것이 C. S. 루이스가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책이나 음악이 아름답다고 우리가 그 자체를 신뢰하면 우리는 배반당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그 대상을 통해 나오며, 그 아름다움은 다시 우리 안에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과 과거의 기억들은 우리가 정말로 갈망하는 실체에 대한 좋은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잘못 인식하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대상은 어리석게도 우상으로 변해 버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거기에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선율의 메아리, 아직 방문하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다.”


탈신화화된 서구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의 외양을 보고 분석하는 일은 배웠지만, 그 대상을 통찰하거나 초월해서 바라보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객관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등 뭐라고 부르든지 결과는 뻔하다. 우리는 창조물을 단순히 자연 그 자체로만 보도록 훈련 받았다. 생명력 없는 해부의 대상이지 기쁨의 대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작업은 이전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을 요구한다. 일단 진흙은 흙덩어리 그 자체로 보인다. 당신이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조각상 옆에 멈춰서는 훈련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그 진흙 덩어리가 뭔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물론 그 대상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흙덩어리를 보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보는 방식은 보여지는 객체(the seen)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는 주체(the see-er)에 의해 바뀐 것이다.


잘 보는 일은 특히 방해를 많이 받는 시대에서는 의도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다. 조각상에서 흙덩어리 이상을 보기 위해서는 초고속 시대에는 흔치 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존중하기 원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보는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다.


고통과 기쁨의 문제들


예술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은 악의 문제를 어렵게 여기도록 만드는 조건들과 상통한다. 조각상에서 진흙덩이만을 보는 눈으로는, 큰 수술 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변색과 흉터자국들만 보게 된다. 반대로, 미술관 벤치에 앉아 의미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훈련된 눈으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기만 하면 항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예술에서의 의미는 고통에서처럼 때로 포착하기 어렵거나 접근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끊이지 않는 고난은 자주 비상식적이거나 불합리하게 느껴져 그로부터 의미를 전혀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명백하게 예술적인 특성을 지닌 음악과 영화도 같은 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을 관찰하는 방법을 더 많이 익힐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의미를 더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은 현실을 바르게 보는 기술을 회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진선미 안에 있는 질서와 결합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친숙하면, 그와 반대되는 추함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표준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의미를 찾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와 다른 절망의 순간 역시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줄 안다면, 고통의 문제 역시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원제: How Art Can Prepare You for Suffering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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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ustin Messer

더스틴 메서는  Boyce College와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MDiv)를 졸업하고 La Salle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있으며, 텍사스주 프리스코에 위치한 Legacy Christian Academy에서 교수 사역과 All Saints Dallas에서 대학청년부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