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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인 신앙을 배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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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형익  /  작성일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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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ohan Reddy on Unsplash

신앙은 본질적으로 깊이를 추구한다. 신앙은 피상적일 수 없고,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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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는 1978년에 출판한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저주거리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1장을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헤르만 바빙크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기독교를 향해 이렇게 썼다. “종교적 생활에 관하여, 미국의 도덕적 낙관적 이원론적 문화, 경험이 이끄는 문화가 엄청난 피상성을 초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죄와 은혜의 대조는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사역은 그저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도덕만 다룰 뿐입니다. 선택과 칭의와 같은 전체 신앙적 요소는 부족하거나 아예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중략] 어떤 이는 “미국인의 신앙생활에는 깊이가 없는 대신 넓이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제임스 에글린턴,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


하지만 피상성의 문제는 비단 서구나 미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이것은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20세기 말인 9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한 이메일이라는 혁명적 통신 수단, 그리고 핸드폰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문자 메시지,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보편화된 SNS 사회관계망의 유행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지식의 축적과 신속한 공유를 가능하게 했지만, 이 현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피상성을 촉진시킨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시대의 상황이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깊이를 추구한다. 신앙은 피상적일 수 없고,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상성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앙과 교회가 직면하고 넘어서야 하는 도전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피상성이라고 지적한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8:11).” 거짓 선지자들이 전한 평강은 피상적 평강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치명적인 영적 질병을 가볍고 사소한 상처 정도로 여기고 반창고나 발라 줄 뿐이었으니, 그들은 깊게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입 속에 고기만 물려주면 피상적 평강을 빌어주고 입에 아무 것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하는 천박한 자들이었다(미 3:5). 이런 거짓 목사들은 지금도 많다!


초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초대 교회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한 거짓 사도나 거짓 교사들의 특징도 결국 피상성이었다. 바울 사도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a)”라고 말할 때, 그는 복음에 물을 타서 희석시킴으로써 피상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수많은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들도 역시 탐심으로 사람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자들이었으니,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천박하고 얄팍한 자들이었다(벧후 2:3). 이들의 특징은 돈이 되는 자들에게 피상적 축복을 빌어주는 일이었다. 그들에게서 영적 깊이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은 일이다.


피상성과의 싸움은 우리 시대,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백성들은 언제나 깊이 있는 신앙과 교회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피상성을 극복하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워나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깊이 있는 말씀 선포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놓지 않았던 주요한 무기였다. 히브리서의 묘사대로,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히 4:12), 성도들이 피상성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드러낼 때,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고(벧전 1:23; 약 1:18; 롬 10:18; 고후 4:6), 그 말씀 속에서 주의 영광을 본 성도들은 깊이 있는 성화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고후 3:18).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시대의 피상적 문화가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침식해 들어오게 된 것은, 깊이 있는 말씀 선포의 부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 미국 교회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지적을 좀 더 들어보자. “교회 건물은 안락하고, 친구를 사귀기에 좋으며, 언제든 환영하고,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 되었지만, 강단은 없습니다. [중략] 교회당처럼 오늘날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오락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는 [중략] 매우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짧고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며 극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말할지를 잘 아는 가장 인기 있고 수요가 넘치는 인물입니다. 활기차지만 가볍고 즐거우며 유머로 양념을 했습니다. 설교는 노래와 합창과 독창과 성악과 기악 사이에 배치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 교회를 지적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강단의 회복이 없이, 신앙이 깊어지고 깊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둘째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을 공유하는 일이다. 구성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는 없다. 죽음은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죽음을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있다. 작년에 나는 교우들과 줌(ZOOM)으로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부부가 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라는 책으로 독서 나눔을 했다. 어린 두 아이를 연이어 잃은 부부가 상실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뎌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공동체 안의 한 가정이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경험이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공동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경험은 비단 죽음의 경험만이 아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의 사건들 또한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겪는 고난의 사건이 적절하게 공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인생을 희희낙락하는 가벼운 태도로 바라볼 수 없게 해준다. 문제는, 그 죽음 같은 상실의 아픔이나 통과하고 있는 고난의 이야기들이 그저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아픔과 고난으로 적절하게 공유되게 하는 일이다. 상실과 고난의 현실을 언제나 직면하는 공동체는 깊이 있는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다.


셋째로, 깊이 있는 사귐(코이노니아)이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과 수치심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DNA가 되었고, 이 죄의 성향들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담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타자들로부터 영적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피상적이고 예의바른 관계 맺음으로 만족하게 되었고, 이것은 깊이 있는 결속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유하게 해준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누리게 된다(고전 4:3-4). 그래서 그는 거절당할 두려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 두려움을 버리고 형제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복음으로 자기를 벗어난 사람은 진정으로 형제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결속과 사귐은 깊이 있는 교회로 우리를 인도한다.


주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를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전체가 달려있다는 말씀이고, 이 두 계명은 결국 하나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결속하고 이웃과 결속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라고 정의하신 셈이다. 바울 사도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도, 천사의 말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전 재산과 심지어 온 몸을 내어주는 구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말씀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전 13:1-3). 깊이 있는 신앙은 깊이 있는 관계를, 그리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운다.


우리는 너무 가볍고 피상적이다. 피상적인 말씀, 피상적인 교제, 피상적인 기도, 피상적인  묵상, 피상적인 섬김, 피상적인 성장에 우린 너무 오래도록 익숙해져 오지 않았는가? 피상성과 거짓 목사들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고 상생적이다. 피상성의 문화는 거짓 목사들을 양산하고, 거짓 목사들은 피상성의 문화를 촉진한다. 당신은 피상성과 싸우고 있는가? 하나님과 맺는 당신의 관계는 충분히 깊이가 있는가? 당신이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는 충분히 깊은 결속을 경험하는가? 피상성의 시대에 깊이 있는 신앙, 깊이 있는 교회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다. 

죄의 성향들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담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타자들로부터 영적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피상적이고 예의바른 관계 맺음으로 만족하게 되었고, 이것은 깊이 있는 결속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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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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