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들을 죽여라” 이 끔찍한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까?
by Alex Duke2021-02-19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이 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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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정말 사랑하는데, 단지 성경 속 몇몇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단어 하나까지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21세기까지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은 순진한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또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사악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보통의 거듭난 기독교인일 뿐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성경 이야기 중 하나가 도킨스가 진짜 싫어하는 창세기 22장에 있다.


여기 도킨스가 그 부분을 설명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서야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이삭을 묶었다. 이삭을 죽일 칼은 이미 그의 손에 들려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천사가 나타나 변경된 계획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결국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을 '자극함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 두 가지 형태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의 괴롭힘, 그리고 뉘른베르크 방어(나치 전범들을 재판한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을 의미한다. 나치 전범들은 거의가 다 ‘나는 그냥 시키는대로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역주)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단지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야.”


표면적으로만 보면 도킨스의 해석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처럼 들린다. 사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킨스가 제기한 이런 의문들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약자에 대한 괴롭힘일까? 은총일까 아니면 비은총일까? 아동 학대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믿음 좋은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축복일까? 


조금만 깊이 조사를 하게 되면 도킨스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사실,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창세기 22장은 일종의 ‘테스트’다


거의 전지적인 서술자로서 모세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이런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벌하셨다거나 아브라함을 유혹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아마도 분별력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왜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시지? 그건 여호와가 아니라 몰렉 같은 이방신이나 하는 짓이잖아?”라며 의아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의문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엔진의 소음처럼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 속에 있는지, 하나님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하나님이 이삭을 진짜 죽이라고 명령하신 건 아니잖아.” 그러나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거의 올림픽 체조 선수 수준의 과감한 해석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부도덕한 행동을 명령하는 부도덕한 신이라는 이 힘든 매듭을 풀 수 있을까?   


'테스트'라는 단어가 핵심이 되는 열쇠다.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이 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그전까지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서 'F(실패)'를 받았다. 기억하자. 아브라함, 이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 대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고(창 12, 20),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창 16) 아내의 종과 동침한 남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물론 하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계신다. 모세는 반 정도만 전지한 해설자인지 모르지만 여호와는 100퍼센트 전지전능한 신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모르는 이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모르고 있던 믿음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이 본문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가 최악의 국선 변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한 나의 방어가 감각과 감수성에서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당신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배심원이다. 당신은 여전히 궁금하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이런 사람이 지금 당신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아브라함과 비슷하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과 관련한 당신의 경험은 하나님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증거로만 잔뜩 쌓여있다. 당신의 상황은 지금 주님을 기소하고 있고, 사실 정직하게만 본다면, 당신이 모은 증거는 종종 압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불리하다. 


괜찮다. 우리는 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아마도 창세기 22장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테스트일 수도 있다.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멘탈을 시험한다. 명령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마치 도킨스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이삭을 죽일 칼을 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창 22:2). 모든 구절마다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그로 인한 심장의 상처는 깊어지면서 불꽃이 튄다. 하나님의 이 요구는 아브라함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믿을 수 없는 압력을 가한다. 그는 몇 년 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는 바로 이 질문을 던져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한 약속을 지키실까?”


이번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과연 바뀌었는가? 그렇다, 그는 바뀌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창 22:3).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의 종들을 일부러 속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과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그리고 모세가 자세히 서술하는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아브라함은 또한 이삭을 죽이겠다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괴롭혔을 이삭의 이런 순진한 질문 때문에 아브라함의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나무를 지고 올라가면서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다 있는데, 번제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애매하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내 아들.”

 

우리는 지금 히브리어 해석이 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내 아들”이 애정 어린 말일까,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일까? 그는 지금 “내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린 양인 내 아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전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나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모래 시계에서 모래가 서서히 떨어져감에 따라, 그는 스스로 계획한 줄 알았던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하나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있었다. 


신약에 들어가게 되면 창세기 22장을 덮고 있던 모든 안개는 사라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황당한 설명은 잊어버리자. 이제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아하! 우리는 지금 막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생각하기 전에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창세기 22장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시는 역사도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는 이것이 '테스트'(히 11:17)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최소한 비유적으로 볼 때 그게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히 11:19). 아브라함이 손에 쥔 도살용 칼은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창 22:10). 그런데 그때 그가 들은 소리는 엔진에서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덤불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였다(창 22:13). 이삭은 사실상 죽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는 말이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던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부활이라는 말로 정의되고, 아마도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님의 이상한 요청을 듣는 아브라함의 눈앞에서는 그의 전 생애가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마침내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므로 그를 신뢰하자고. 


아마도 그는 아내와 자신이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고” 또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창 18:11; 히 11:11)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식을 준다고 약속하셨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봤던 사라의 웃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던 사라의 냉담한 대답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주님의 부드러운 꾸짖음도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아마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 부활, 부활이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삶은 부활의 연속이었다.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에게 부활의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과 사라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히 11:12)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없었지만 그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창 22:17)가 실현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사람 하나를 부활시키는 것이 주님에게 어려울까? 당연히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지 못하시겠는가?


무엇을 보는가?


창세기 22장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브라함이 본 것을 여러분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은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 네온 사인과도 같다. 그 연결점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사건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명하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순종적인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의 등에는 나무짐이 들려있다. 그리고 저기에는 대속하는 숫양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부사항보다 더 예측 가능한 것은 창세기 22장 속 사건이 발생한 장소, 바로 모리아 산이다. 다름 아니라 미래에 성전이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대하 3:1). 이것은 이삭이 피했던 희생이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에서 몇 번이고 희생을 바치는 사이에 아브라함의 역사와 경험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은 희생을 드렸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공급하심을 찬양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끝냈다. 그의 피는 더 이상 반복적인 희생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게 만들었다(히 9:11).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삭의 희생이 우리를 위해 제도화 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단지 믿고 또 믿을 뿐이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믿음은 이제 의로 간주된다(창 15:6; 갈 3:6). 그리고 이삭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바울이 인간적인 공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데 집착하는 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 이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6–7, 13–14)


다시 묻겠다. 창세기 22장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바라건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신뢰, 그리고 믿음을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약속된 축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축복은 이제 당신에게까지 다다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함인가!




원제: Kill Your Son, Abraham: Making Sense of a Shocking Comman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더 이상 이삭의 희생이 우리를 위해 제도화 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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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lex Duke

알렉스 듀크는 9Marks의 총괄 에디터이다. 그는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ird Avenue Baptist Church에서 청소년 담당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