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왜 필요한가?
by Brad Wheeler2018-11-16

지난주에 나는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 설교를 준비하는 데 약 25시간을 할애했다. 사무엘상 9-11장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 이 설교에서 나는 전체 본문을 먼저 읽고, 그 다음 40분에 걸쳐 그 의미를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를 회중에게 적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데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중이 나의 (때로는 고통스러운) 혼잣말을 들으려고 시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예전에 이런 질문들을 받은 적이 있다. 또는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질책하기도 했다.  “왜 너는 예배의 다른 부분보다 설교를 특별히 중시하니?” “그렇게 하는 방식은 합리적, 이성적, 체계적 강론을 선호하는 서구 문화를 반영하는 건 아니니?”  “네가 말하는 내용의 95%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성도들은 시간 허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지역 교회에는 설교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말씀을 듣는다


나는 앉아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화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요란한 드럼 소리에 힘이 나며, 예술 작품에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 관계를 세우셨다. 이때 그들에게 함께 모여서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셨다(출 24: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대적들을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20마일 북쪽으로 나아가게 하신 후에 다시 둘로 나누어 각각 맞은편 절벽 앞에 세우셨다. 그곳의 깎아지른 듯한 두 산들이 자연적인 대강당 역할을 했다.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4-35). 남방으로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와중에 그러한 일을 행한 것은 의외의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전쟁이 아니고, 그들은 보통 민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창조한 말씀이 곧 자기 민족의 삶을 규정짓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전쟁 중에도 말씀을 놓지 않았다. 여러 해 후에, 요시야가 언약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때에도, 그는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었다(대하 34:30). 본토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였을 때,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나무 강단에 세웠다(느 8:4).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느 8:7), 에스라와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에 적힌 이사야서를 읽으신 후에 다시 그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눅 4:14-22).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복음과 관련된 다른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베드로의 공개적인 요엘 2장 강해를 통해서였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이 세워진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고(행 6: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했다(딤후 4:2). 이외에도 얼마든지 성경 속 예를 더 들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마음을 흥분하게 하지만, 우리의 귀는 영혼의 힘을 얻게 한다. 우리는 천국 문과 지옥 불의 장면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는 성경 읽는 방법을 가르친다


얼마 전에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한탄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 크리스천으로서 용기를 지니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더욱 불거지는 성(性)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화적 태풍이 덮쳐올 때, 당신은 이에 대해 대항할 말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없다면, 이는 성경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성경에서 하는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성경을 도덕적 이야기 내지 이솝 우화의 종교버전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생활의 핵심으로 보전한다면, 특히 성경의 연속적인 본문을 연이어 설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면, 교인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굳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실한 설교다. 곧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의 능력, 첫 아담의 실패, 희생 제사의 필요성, 둘째 아담과 새 에덴에 대한 약속을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설교를 들려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 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주는 설교가 필요하다. 내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그 말씀을 이를테면 채굴할 금이 가득한 광산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나가는 길에 주울 수 있는 몇몇 자갈들이 흩어진 작은 언덕 정도로 여겼다. 다행히도 나는 이후에 풍성한 성경 주제들을 세밀히 연결시키고, 또 그 모든 내용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들려 주는 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의 설교가 바로 금광을 캐내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고, 나는 비로소 확신과 용기를 지니고서 구약성경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와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을 때, 성도들이 성경 읽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교인들의 삶이 변화한다


만일 설교 내용의 대부분을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 설교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 하지만 성도들은 들은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결혼, 재물 등에 관한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기억할 것이며, 이런 설교들로 인해 변화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설교 자체를 무익하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한편의 설교가 교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다. 설교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일까지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도들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한 번의 설교가 한 주를 지켜 주는 말씀인 것이다. 즉, 매주의 설교는 우리를 다음 주일의 예배로 이어준다.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시므로, 더 이상 설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Why Preaching?

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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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ad Wheeler

브래드 휠러는 알칸사스 페야테빌에 위치한 University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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