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다움(masculine)의 미래
by Greg Morse2020-12-14

저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적이다

He who sits enthroned above is unescapably masculine.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당신은 남성다움(masculine),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거야. 황금 사자, 수염 난 황소와 같이 크고, 방해가 되지 않는 소유물은 난장이들이 조심스럽게 만든 침대를 마구 흩어놓을 때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당신의 원시 왕국을 흩어지게 만드는 거지.” 감독은 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성다움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낀다니.


바로 이 지점에서 C. S. 루이스(C. S. Lewis)의 우주 이야기 3부작의 피날레 ‘그 가공할 힘’(That Hideous Strength)에서 불행하게 결혼한 주인공 제인은 오늘날 우리가 현대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된다. 소설 속에서 제인은 강하지만 복종하는 기독교인 아내인 미세스 딤블이 드러내는 여성성과 정반대 위치에 자리잡은, 직업을 추구하는 평등주의 비기독교인이다. 


지금까지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던, 사실상 황금 사자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을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던 세상이 기울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인간이 아닌 물물 교환의 대상이자 욕망 및 소유의 목표물로 취급되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 멀찍이 둘 수 있을 정도로 힘든 한숨과 비웃음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서 남편 마크를 선택했다. 마크는 그녀를 “정말로 이해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크가 제인의 자주적인 행동에 그 어떤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갑자기 현실이 그녀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턱수염에 당황해서


우리는 지금 제인으로 붐비는 사회에 살고 있다(비록 운전면허증 속 이름은 제이슨이라고 해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턱수염 난 황소에게 반항하며, 그에게 거칠고 억압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포효, 인류의 머리, 창조의 왕, 남자, 등등의 단어에 불쾌감을 느낀다.


오늘날의 “덕이 있는(virtuous) 남자”는 그냥 남자보다 훨씬 더 큰 미덕으로 묘사된다. 그는 순응하고, 존중하며 또 부드럽다. 무엇보다 그는 나이스한 사람이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세금을 내며, 항상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스캔들과 “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안전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죄악으로 물든 세대를 향해서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뜨거움도, 열정도, 힘도, 그리고 그 어떤 목적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남성다움-근육질이고, 대담하며, 무게감이 있는 것-은 이제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불쾌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현대를 사는 남자라면 결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제인의 관점에 빠져 있다. 오래된 진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머리와 돕는 자(역자 주: 아담과 이브에게 붙여진 호칭, 즉 남자와 여자를 의미함) 둘 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또한 두 사람 다 그 가치라는 면에서 서로 동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며 또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상속한다(창 1:27; 고전 11:11-12; 벧전 3:7). 그러나 이런 진실도 서로에 대한 구분이 남아있는 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여자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에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고전 11:9). 그들은 공동체 모임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읽을 때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든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2–13).


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모든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며 합법적인 한 모든 일에서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결혼 서약서에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겠다고 주장한다(엡 5:22-24).


남성다움이 과거에는 지배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었다면, 이제는 무관함(irrelevance)이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결론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제 남자는 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하고 대신 남자는 여자가 힘을 써도 된다고 허락할 때에만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제인의 많은 아들과 딸이 생각하듯이, 이제 미래는 여성다움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그 남자


감독의 다음 말은 은유의 힘을 통해서 제인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똑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탈출할 수 있었던 수컷은 생물학적 수준에서만 존재해. 그러나 남성다움, 그 자체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적과 동의하는 게 좋을 거야.”(313)

저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적이다.


우리 세대가 남성다움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또 왜곡하는 정도에 상관없이 감독은 제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이 땅에서야 남편, 아버지, 그리고 왕을 피하고 부끄러워하고 누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가 오신다.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심판자이자 왕이시다. “영혼은 이 땅의 남성을 우회하여 훨씬 더 남성다우며 또 훨씬 더 높은 분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분 앞에서 더 깊이 굴복해야 한다.”


오늘날 고대 바리톤 안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혹적인 반주, 바리톤의 목소리에 맞는 또 다른 목소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성스러운 음색에 감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같은 음표가 피아노에서 연주되고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동등하게 울려 퍼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차이를 결코 보지 못하게 된다. 저기 머무는 이의 소리가 천둥과도 같고 그의 낮은 울림이 참나무를 떨게 하고 숲 전체를 벌거벗게 하신다 (시 29:9). 당신이 만나는 거룩한 성도들 중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실된 남성다움을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룩한 그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아빠라는 이름의 여자?


그런데 하나님이 남자(he)라고?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데 왜 우리는 피조물 영역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사소한 성적 구별을 하나님에게까지 해야 하는가? 


제인도 처음에는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 또한 영적 영역에서는 성별과 같은 구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영적 세계로 가는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서로 간의 대비가 주는 차이가 더 풍부하고 더 날카롭고 오히려 더 치열할 수도 있겠다는 의혹이 생겼다”(312).


다시 말해, 그녀는 이제 평등한 결혼은 중성적인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재고해야 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가 지상에 있는 자신을 침범하는 남성적 머리라는 직분의 흔적이 사실상 “가장 높은 영적 세계에서는 훨씬 더 크고 혼란스러운 수준(modes)에서 반복되는 현실과의 충격적인 접촉의 첫 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쉬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312).


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여성적인 은유(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여성적인 칭호나 대명사를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님)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의 경우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이 따라온다(예: 사 66:13; 호 13:8; 마 23:37).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화 ‘오두막’(The Shack)이 악명 높게 묘사한 것처럼 결코 “아빠”(Papa)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여성이 아니다.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해버린 기독교의 성경을 잠깐 상상해보라. 


“하늘에 계신 그녀가 웃으심이여 그녀가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그녀가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여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4-6)


“그 숙녀(Lady)는 전쟁의 여왕이시니 그 숙녀(Lady)가 그녀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딸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녀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녀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어머니라, 평강의 공주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영원토록 하나님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니라 영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남성이라고 밝히셨지만, 신약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성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몸을 취함으로써 논쟁을 단번에 해결하셨다. 아들은 남자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성경적인 남성다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남성다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남성다움 자체에 대한 반란은 깨어질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표지판은 거리에 흩어져 나뒹굴 것이다. 아담의 아들들을 다스리려는 현대의 욕망은 침묵할 것이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전쟁의 레이디가 아니라 전쟁의 왕자로서 그가 구출하러 올 것이다. 결코 여왕이 아니라 왕으로서. 암사자가 아니라 유다의 사자로서 말이다.


자,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지금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공격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권위와 머리됨이라는 직분 자체의 구분을 무시할 정도로 무섭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은 단번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남자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반역의 큰 죄를 지은 사람들 중 일부가 남성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남자들조차도 다음 이 말을 깊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아버지와 아들,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목사들과 신적 힘을 가진 통치자들 조차도 여성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모든 관계는 창조 세계 속에서는 자연스럽고 또 확실히 남성적이지만,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모두가 다 신부인 것이다. 


언젠가 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남성다움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남성다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향해 그 어떤 잠재적인 두려움 없이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하시다. 




원제: The Future of Masculinity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성경적인 남성다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남성다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Biblical manhood, many have escaped. But the Masculine to which all of Scripture points, none of us can escape.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