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세월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다
by Russell Moore2020-11-06

우리가 때때로 잊어 버리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루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The reason Narnia persists in our imaginations is that Lewis knew something about us that we sometimes forget. We’re not mere cerebral networks or limbic systems, but creatures made to look for sign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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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C. S. 루이스(C. S. Lewis)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 출판된 지 70주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 대해서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묻기에 아주 적절한 때를 만난 셈이다. 우리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루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대뇌 네트워크나 변연계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표지판(signposts)을 찾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논리적 이유나 실용적인 지혜 또는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을 다루고 있다. 바로 사자의 포효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력을 통해 그 느낌을 알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기도 하다.


기독교 변증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면 나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서구 사람들이 거의 항상 일등으로 꼽는 책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이다. 턱을 쓰다듬으며 이런 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글쎄, 사실은 말이야”라며 반론을 제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진리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 아니다. 물론 그 책 속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야말로 실로 긴 시간동안 아이를 공격하는 독수리와 같은 많은 비판을 견뎌온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기독교가 아직까지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그 책이 활자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종교가 가진 냉소주의와는 달리 우리에게 정치적 의제나 종교 제품을 판매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되신 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론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흔들리는 기독교인을 다시 확신 속에 거하게 하는 루이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옥스포드에서 받은 고전 연구가로서의 훈련이 아니라, 아이들을 작은 방과 가로등 기둥을 지나 나니아 왕국의 수도인 케어 페러벨(Cair Paravel)과 그 너머로 인도했던 경험이다.


오늘날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판타지 작가인 닐 게이먼(Neil Gaiman)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루이스가 “숨겨놓은 정통 기독교에 관한 의제”에 관해서 배우고 싶었던 흔들림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루이스의 작품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이 루이스가 창조한 마법의 세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니아 관련한 책들이 주는 이상한 점의 대부분은 마치 그 책 속 이야기가 사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실제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기록된 보고서 같이 느껴진다.”


나니아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판타지 장르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루이스의 동료 잉클린(Inklings)조차도 J.R.R. 톨킨(J.R.R. Tolkien)의 작품에 나오는 중간계와 같이 신중하게 구성된 창작물과 비교할 때, 나니아는 루시가 옷장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 및 그 이상과 합쳐진 유대와 기독교 우주론은 아예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로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니아는 대중문화에서 70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나니아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인생 전체를 함께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겉보기에 혼란스럽고 황당한 신화가 주는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우주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아마도 “암흑 물질”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장소”라는 게 항상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이상한 우주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기쁨에 놀라다


나니아의 기이함, 차와 벽난로 등의 친숙함으로 표현되는 기이함은 여전히 이 책을 매력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현대주의자(modernist)든 또는 근본주의자든 간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은 학문적 합리주의나 문명적 헤게모니 또는 좌파, 우파 또는 중도의 정치적 이념 등을 활용해서 무엇보다 기독교를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데에 치중했다. 그러나 나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루이스는 그가 살았던 세대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복음이 너무 신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너무도 친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다의 사자(The Lion of Judah)는 어느새 잘 길들인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성경 속의 서사는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어느 존경받는 문화의 대본책과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그런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상상의 세계로 던져서 주일학교 스테인드글라스 속 이미지를 다 벗겨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가진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용을 피해서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은 사람도 갈기가 다 깎인 채 스톤 테이블에서 죽은 아슬란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에드먼드를 미워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실상 그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달한 터키 과자 로쿰(Turkish Delight)에 중독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은, 에드먼드에 대한 아슬란의 말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은혜 때문에 우리는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에 당신의 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걸까?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녀의 마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양심을 보호하고 또한 직관을 형성한다. 뉴스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소식은 필터링해서 제거함으로 나 자신의 이성을 “조작(spin)”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던 안전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기쁨에 놀라게 된다. 나단 선지자가 어린 암컷 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다윗과 이성적인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다윗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감정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다윗은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각종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용서는 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정형화하거나 또는 도덕적 적용으로 요약하는 대신 “한 남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가 펼치는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단순히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하다”라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접붙여진 가지도 살아있는데, 하물며 뿌리가 죽겠느냐?”


나니아 기독교인


스톤 테이블은 십자가, 하얀 마녀는 악마, 마술사의 조카는 창세기처럼, 나니아 연대기가 단지 해독(decode)할 게 많은 우화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지속되는 게 아니다. 나니아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진짜를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니아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겨울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정신의 눈이 녹기 시작하고 성령의 바람이 그가 뜻하는 곳에서 불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세속화 시대에 나니아처럼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기에 좋은 장소도 없다.

하지만 물론 이 70년이나 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루이스는 아이들에게 여분의 방은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포털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 경로로 다시 나니아에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거기로 가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 도달하는 건 당신이 의도적으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장수했다고 성경이 인정하는 나이가 70세이다. 우리는 이야기꾼 루이스로부터 배운 복음,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그 복음을 더 깊이 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또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스크루테이프 세계(Screwtape world)에서 나니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hronicles of Narnia Still Grips Our Imagination, 70 Years Later

번역: 무제

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던 안전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기쁨에 놀라게 된다

Lewis recognized a central biblical truth about human nature. … By walking outside the protected places, we can be surprised by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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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ussell Moore

러셀 무어는 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MDiv)와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PhD)에서 수학했다.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회장이며 미국 TGC의 이사이다. 저서로는 '폭풍 속의 가정', '입양의 마음', 'Onward: Engaging the Culture without Losing the Gospel'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