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를 아름답게 하는 질문 여덟 가지
by Bobby Jamieson2020-10-31

누가 봐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희석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Am I speaking about this matter in a way that makes it plain to everyone that I know the gospel is more impor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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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금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같은 교회 교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음식과 환경 윤리 사이의 관계, 얼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 법관이 다가올 대선 투표에 미칠 영향, 이번 가을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지에 대한 문제 등등.


어떻게 해야 이런 쉽지 않은 대화를 잘 할 수 있을까? 대화 전과 대화 중에도, 그리고 그 대화를 끝내고도 내가 중점을 뒤야 할 핵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여기 고려해야 할 여덟 개의 질문이 있다.


1. 이 주제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가?


로마서 14장에는 음식과 관련해 과거의 관습에 여전히 매여있는 사람들과 또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는 바울의 메시지가 나온다. 바울은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훨씬 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뭘 먹느냐 안 먹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사실상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양 쪽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 후, 거기에 따른 합당한 방식으로 대화와 행동의 틀을 잡도록 요청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게 복음의 문제까지 관련시킬 정도로 중요한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를 가지고 내가 행여나 복음의 중요성이 달린 것처럼 너무 심각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누가 봐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희석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2. 내 입장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가?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얼마나 확신하는가? 당신이 판단의 근거로 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 증거 중 몇 개가 과연 성경 안에 있고 또 몇 개가 성경 밖에서 찾은 것인가? 증거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얼마나 포괄적인가? 당신이 가진 증거와 관련해 당신만큼 또는 당신 이상으로 연구한 사람들 중 당신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지금 다루는 주제에 관해 확신하고 있는가? 믿음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배타성에 대해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이란 불의를 바로잡는 데에 필요한 수단에 대해 확신하는가?


첫 번째 단계는 신념의 종류에 따라서 확신의 단계(levels of certainty)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류에 따라 틀렸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있고,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더 쉽게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커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해 가진 확고함과는 달리 당신의 입장이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3. 상식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든지 반대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서로를 단지 형제자매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합리적 사고 능력을 가진 형제자매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서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여전히 형제자매로 남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하게 행하며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세례와 관련해서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유아 세례에 관해서 또 세례는 오로지 신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할 수 있다.


물론 세례는 세 번째가 아닌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이다. 지역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세례에 관해서 합의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다. 당신이 가진 지적 공감 능력(intellectual sympathy)은 어느 정도인가? 손에 든 확성기를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찬찬히 그의 생각을 둘러볼 생각이 있는가?


4. 서로 동의하지 않고도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인은 복음 교리와 복음적 정치 형태(gospel polity)라는 두 가지에 동의해야 한다. 건전한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사실상 다 이 두 가지 범주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건전한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필수적인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원칙적으로 교인을 출교하는 데에 근거가 되는 회개하지 않은 죄 또는 회개하지 않는 신학적 오류는 함축적으로나마 신앙고백과 교회 언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 잘못의 근거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범주 외에도 광범위한 신학적 입장, 정치적 신념, 실질적 선호 등 다양한 이슈가 있다.


그렇다면 서로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도 여전히 같은 교회의 지체로 있을 수 있는 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항을 더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서로간의 하나됨을 더 촉진시키고 유지하기 쉬워질 것이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이 주제와 관련해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인가?”


5. 내가 다른 사람보다 논쟁하기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논쟁에서는 이겼지만 사람을 잃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건 또한 하나됨을 무너뜨린다. 달리 말해 그건 논쟁에서 이겨서 얻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것을 잃은 것이다.


다른 형제의 영혼에 상처를 주고 말싸움에서 점수를 딴 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인가? 다른 자매의 사랑이 줄어든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잠언은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타인의 상태와 필요를 맞춰주는 것인지에 대한 조언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


당신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정된 팔로워가 있는 소셜 미디어 계정도, 또 지금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리는 당신과 달리 실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논쟁을 하더라도 상대편이 마지막 말을 하게 하라. 상대가 가진 한계(threshold)가 어디쯤인지 알아내고 거기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논쟁을 멈추라.


논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당신은 진리의 씨를 뿌리고 거기에 우정의 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설혹 우정이 깨지게 된다고 해도, 그 우정을 깨는 장본인이 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6. 행여 교회의 하나됨보다 어떤 특정 주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때때로 침묵은 웅변이고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이다. 셜록 홈즈는 개가 짖지 않은 이유를 알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개가 짖지 않았다면, 한밤중에 마당에 들어왔던 사람을 그 개가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홈즈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로마서 14-1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설득력 넘치는 침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은 음식 규정과 같은 옛 언약의 의식법이 새 언약 신자들에게도 구속력이 있는지 여부를 다룬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이것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물론 바울의 입장이 있지만 여기에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한 장 반에 걸친 토론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단 한 번의 주장도 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쓴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각자 다른 양심을 가진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의 목표는 논쟁적 설득이 아니라 목회적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애완동물 문제 보다 교회의 하나됨을 더 중요시하라. 바울처럼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불일치를 통해 오히려 더 사랑하도록 도우라. 당신과 동의하지 않고 또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당신 마음속에 애정의 공간을 만들라.


7. 이 대화를 하기에 지금 여기가 적합한 시간과 장소인가?


딱 하나 실질적인 적용을 해보도록 하자, 바로 소셜 미디어 이야기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이것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 성경적 커뮤니케이션 원칙이다. 바른 이유를 가지고 바른 시간에 바른 방법으로 바른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29절을 소셜 미디어에서 지키기는 너무도 힘들다. 소셜 미디어는 사실상 중립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대화가 너무도 쉽게 갈등으로 바뀐다. 왜 이 말씀을 소셜 미디어에서는 지키기가 어려울까? 다음 네 가지 요소 때문이다.


(a) 소셜 미디어에는 비대면이 주는 “온라인 무례 부작용(online disinhibition effect)”이 있다.


온라인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나눌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모든 종류의 상식적인 조심과 절제(reserve), 감수성과 동정심은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의 얼굴 대신 스크린 속 대화 상자를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린다.


(b) 소셜 미디어에는 “친밀함의 수위 조절(gradients of intimacy)”이 힘들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또 누가 듣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즉, 누가 듣고 응답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상황에 맞게(소용되는 대로)” 말하라고 촉구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선 그런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게시물은 군중 속으로 발사하는 불꽃놀이와 같다. 누구에게도 일부러 불을 붙이고 싶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당신의 글 때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친구와 일대일로 있을 때와 백 명이 모여 있는 거실에서 말할 때가 같은 방식일 수 없다. 소셜 미디어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실로 생각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폭도들이 모인 거실과 같은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c) 소셜 미디어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가득하다.


당신과 내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당신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으로부터 실시간 피드백을 받을 것이다. 설혹 당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든지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보고 있는지 또 누가 반대하고 또 누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마디로 귀한 도자기를 깨부수고 있는데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자본금을 날리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뢰를 잃어버린 우정은 급격히 고도를 잃고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거의 항상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d) 소셜 미디어는 교육 받지 않은 선생, 책임 지지 않는 선생을 만들어낸다.


소셜 미디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손에 확성기가 들려있다. 보다 전통적인 미디어(예: 설교, 강의실 강의, 서적, 잡지 또는 신문)에서 무슨 말을 하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은 목사를 검증한다. 교장 또는 학장은 교사를 인터뷰한다. 편집자와 사실 확인 담당자는 기사가 인쇄되기 전에 그 기사의 진위를 검토하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손짓하는 무료 초대에 대답만 하면 된다. “바비,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그렇기에 소셜 미디어는 야고보 사도가 가장 엄중하게 던진 다음 두 가지 경고를 싸그리 무시하도록 만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1–2).


따라서 게시물을 올리기 전에 물어야 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지금이 바른 시간이고 또 여기가 바른 장소인가?


8. 서로가 더 하나되는 방향으로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군가 반대할 때 당신은 오히려 기뻐하는가?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중에서 최소한 한 명 이상은 반대할 때에도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건 당신에게 반대하는 그들이 적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비롭고 또 친절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일치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깊이를 표현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반대하기 쉬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학생 중 한 명이었던 조지 왓슨(George Watson)은 루이스가 죽고 몇 십 년이 흐른 후에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최고의 선생님이자 최고의 동료인 그는 자신의 신념을 내가 공유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 그의 태도는 공손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무자비하다고도 묘사될 수 있습니다. … 당시 그가 가진 두 가지 열정은 문학 자체와는 별개로 사람과 논쟁이었지만, 그는 그 둘을 혼동하는 실수를 자주 범하진 않았습니다. … 그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독이 전혀 없는 활력을 가졌고, 그는 또 관대했습니다. …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입니다. 반대하는 방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the art of disagreement)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경지를 허락하시길 간구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Master the Art of Disagreement—in the Church and on Social Media

번역: 무제

소셜 미디어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실로 생각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폭도들이 모인 거실과 같은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It can be easy to treat social media like it’s a living room, when in reality it’s more like a shapeshifting mob, clustering around whoever has the loudest mega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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