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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훈육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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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Tilly Dillehay  /  작성일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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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Ingi Finnsson from Pixabay

경건한 양육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 이상이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Godly parenting is much more than establishing authority. And establishing authority is more than the rod. But it’s not less than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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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 2020년이 주는 여러 가지 압력 외에도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육아에 대해 늘어난 중압감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자녀와 보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녀에게 더 많은 죄를 짓고, 또 부모를 향한 자녀의 죄도 같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간을 더 많이 함께 보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족과 생활하는 게 과연 장기적으로 옳은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더 많아진 시간은 더 많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균열은 2020년에 새롭게 나타난 게 아니다.


얼마 전 예쁜 딸을 낳은 젊은 크리스천 엄마는 지금 시대를 지배하는 육아 철학을 초조하게 탐색하는 중이다. 딸과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두렵다고 털어놓은 세 살짜리 아이를 가진 자기 친구에 대해, 그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엄마가 ‘율법 기반 육아(law-based parenting)’를 믿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끊임없는 아이의 울화와 반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했던 젊은 엄마도 “율법 기반 육아”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엄격하게 대하는 것 또는 뭔가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젊은 엄마도 불순종하는 경우에 엉덩이를 맞으면서 자랐고, 또 부모가 때리는 게 다름 아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친구 중 그 누구도 잠언에서 “회초리(막대기)”라고 부르는 것을 자녀에게 사용하는 거 같지는 않다고 내게 고백했다.


나는 같은 현상을 발견했다.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들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공포 기반 양육 또는 율법 기반 양육 등)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문제는 그런 그들이 어린 자녀를 훈육해야 하는 방법과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복음적 대화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들과 대화를 하도록 인도하는, 아주 훌륭한 기독교 양육책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을 쓴 저자는 지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는 몇 가지 기본 도구를 당연히 써야 한다고 가정했던 것 같다.


실생활에서 훈육 메커니즘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출발점을 제공하는 일종의 관계적 신뢰를 확립하는 데에 회초리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데에 회초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를 수 있다.


훈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


밀레니엄 세대의 어느 부모가 지금 내 또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권위”라는 한 단어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젊은 부모들 사이에서는 ‘은혜 기반 육아’ 대 ‘율법 기반 육아’라는, 잘못된 이분법이 설정되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최근 방청소를 하라는 말을 무시하는 아들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들을 대신해서 청소를 하는 “은혜를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아들로 하여금 강제로 청소를 하도록 하는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물었다. 온라인에서 아이들에게 억지로 저녁을 먹도록 하는 것을 꺼리는 엄마들의 댓글을 본다. 왜냐하면 그게 아이들로 하여금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도록 함으로, 아이들을 어떤 의미에서 작은 바리새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과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은 절대 믿을 게 못된다. “노”가 노의 의미가 아니고, 또 “예스”가 항상 예스를 의미하지도 않는다(마 5:37). 우리는 끊임없는 논쟁, 속임수, 잔소리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가정 속에 기본적인 질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해도, 우리가 하는 명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는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아이들 눈에 반복해서 부모가 하는 말과 실제 의미가 다르게 보이는 경우, 아이들은 하나님도 부모처럼 얼마든지 말씀과 실제 의도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에게 은혜를 보여주신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녀에게 은혜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가족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필요한 권위, 순종, 관계, 축복이라는 자질을 자녀들이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육아가 주는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차원에서 이미 그들과 교제하고 있으며, 교제가 어떤 느낌인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갖고 있다. 그건 웃음소리 같은 거다. 그건 좋은 음식 같은 거다. 그건 명령 같은 느낌이다. 또 축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훈육이 주는 고통스러운 결과처럼 느껴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5–9, 잠 3:11–12 인용)


이 구절은 형벌을 받을 운명인 하나님의 적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고 계시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아빠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면밀히 살펴봐야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분노에서 비롯된 변덕스러운 채찍질이 아니라, 이미 그분에게 속한 자녀들을 사랑과 인내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 종류의 훈육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잠언 속 회초리


가정에서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단어를 찾고자 한다면 잠언은 우리에게 많은 근거를 제시한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 29:17)


분명히 이 구절들은 회초리를 쓰는 방법과 이유, 그리고 예외에 대한 다른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를 거의 찾을 수 없는, 확실한 진술이다. 잠언이 회초리의 사용을 칭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잠언은 회초리의 원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잠언을 규범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잠언은 규범집이 아니라고요. 이건 지혜 문학입니다!”). 그런 시각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묻고 싶다. 우리는 지혜롭게 되기를 원할까 아닐까? 성경 저자는 지혜롭게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성경이 회초리를 사용하는 육체적 규율을 왜 그토록 강력하게 지지하는지, 또 다른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회초리에 대한 반대


집에서 사용하는 육체적인 훈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몇 가지 상식적인 회초리 반대 이유가 떠오를 수 있다.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은 어떤가? 입양된 자녀, 학대 경력이 있는 자녀는 어떤가? 또한 회초리가 합법적인가?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나? 그리고 신체적 학대로까지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큰 문제 많은 부모는 또 어떤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회초리는 단순히 육체에 가해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다. 회초리 속에 담긴 원리는 이것이다. 죄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가해지는 현재 약간의 고통은 장기적인 열매를 거둘 것이다. 따라서 자녀 또는 부모가 육체적 훈육을 현명한 방법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병력이나 질병이 있는 경우에도 이런 회초리의 원리가 관계적인 상황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세상에는 질서(structure)가 있음을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며, 부모는 사랑과 함께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죄가 어떤 유치한 형태로든 겉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올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부모는 아이들 스스로 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라도 죄를 똑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의 상황에서조차도 죄를 제대로 처리하기를 원한다.


회초리 없이도 그런 부모의 권위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것은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경험 많은 부모들에게 겸손하게 의견을 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자녀가 앞에서 말한 소수에 해당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예외가 성경의 명령을 무시하는 변명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적인 질문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현재 미국 50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 모두에서 가정에서 행해지는 신체적 징계는 합법이다. 게다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주(주로 남부 및 중서부)에서는 학교에서 쓰는 회초리도 합법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서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회초리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스코틀랜드는 모든 종류의 신체적 규율을 금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거기에 동조한 국가가 되었다. 즉, 여기에는 시민 불복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지혜, 특히 인간의 지혜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allegiance)이 필요하다.


권위와 세속 선각자들


지난 몇 년 사이에 양육의 권위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단어 중 일부는 세상의 연구 결과에서 나왔다.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신드롬’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이 현상은 오늘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진술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가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에서 임상 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피터슨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원죄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많은 부모와 아이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만 노는 아이는 “작은 괴물”이 될 수 있다(125). 자치가 허용된 아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이다. 피터슨은 어른이 위치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때 아이들은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회초리도 거기에 필요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한다(141).


‘부모 양육의 붕괴(The Collapse of Parenting)’를 쓴 레오나르드 색스(Leonard Sax)는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 또 뭘 하고 놀지, 가고 싶은 학교까지 결정하도록 허용한 어느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30년 동안 권위는 엄청난 속도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옮겨졌다”(7). 그는 이러한 권위 이전에 관한 사항을 과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 미국 학교의 학업 성취도 저조, 취약한 학부생 등 다양한 문제와 연결시킨다.


피터슨과 색스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까지 기꺼이 한다. 피터슨의 책 중 한 챕터는 “당신이 자녀가 싫어지도록 만드는 일을 아이들이 하지 않도록 하라”이다. 기독교인 부모라면 자녀가 하는 어떤 행동 때문에 부모인 내가 그 자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색스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12살짜리 소년이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다. “차 돌리라니까, 입 닥쳐. 넌, 그냥 운전이나 해”(6). 우리는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강한 경고는 지혜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더 강한 표현도 나온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 19:18). 다음처럼 이 구절을 번역한 성경도 있다. “네 아들을 훈육하라 … 매맞는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찰스 브리지(Charles Bridges)는 1847년에 이렇게 썼다.


“거짓된 부드러움보다 겉으로는 가혹해 보이지만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자비가 있다. 아이에게 우리가 결심한 것을 보게 하라. 약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도록 하라. 자녀가 건강한 교정을 받으면서 우는 게 훨씬 낫다. 자녀가 맞으면서 흘리는 눈물이 나중에 자신과 자녀들을 소홀히 훈육한 결과 맺은 쓴 열매 앞에서 후회하며 흘리는 부모의 눈물보다는 훨씬 더 낫다.”(271)


이런 식의 언어는 자녀가 아주 어린 부모의 눈에는 좀 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죄가 나중에 그 애가 중년이 되었을 때 짓는 죄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육아에 대해 교훈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냉정한 언어는 성서 속 지혜서를 쓴 저자들에게는 전혀 지나친 게 아니다. 게다가 색스와 피터슨과 같은 세속적인 선각자들에게도 지나친 게 아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도 지나친 게 되어서는 안 된다.


멘토링과 회초리


경건한 양육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 이상이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그리고 회초리 사용에 대해서 성경이 비중있게 다루는 말씀을 통해 우리 젊은 부모는 회초리를 왜,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배워야 한다.


일부 기독교 자녀교육 책에는 회초리에 대한 유용한 언급이 있다. 레이첼 젠코비치(Rachel Jankovic)는 ‘어린 시절을 사랑하라(Love the Little Years)’에서 훈련을 위한 즐거운 비전을 제시한다. 진저 허바드(Ginger Hubbard)가 쓴 ‘셋까지 세게 하지 마(Don’t Make Me Count to Three)’는 매우 실용적인 책이다. 그리고 테드 트립(Tedd Tripp)은 ‘자녀의 마음을 목양하기(Shepherding a Child ’s Heart)’에서 한 장에 걸쳐서 회초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나는 밀레니엄 세대의 부모가 이 일을 잘한 이전 세대의 부모에게 다가가 가장 기본적이고 또 실용적인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떻게 사랑으로 징계합니까? 언제 징계합니까? 회초리로 무엇을 사용합니까? 징계하고 나서 자녀들과 어떻게 기도하나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기는 어렵다.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은 모범 답안을 듣도록 하라.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당신이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경우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훈육을 받지 못했고, 또 밀레니엄 세대 중 상당수도 당신과 비슷한 처지라면, 개인적인 영향과 지원 없이는 자녀 교육을 위한 좋은 비전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나는 또한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교회의 젊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엄한 모습을 보여줄 경험 많은 부모들도 만나고 싶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파견된 대사이다. 은혜, 사랑, 기쁨, 질서의 대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자녀를 징계할 때 자녀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


이것이 바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즐겁고도 복잡하며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육아라는 책임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he Rod Can Point Children to God

번역: 무제

부모는 아이들에게 파견된 대사이다. 은혜, 사랑, 기쁨, 질서의 대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We’re ambassadors to our kids. Ambassadors of grace, of love, of joy, of order. We’re ambassadors of God’s own heart. And in order to show him to our kids, we must be willing to love them as he loves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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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lly Dillehay

틸리 딜레헤이는 TGC의 작가로 'Seeing Green: Don’t Let Envy Color Your Joy'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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