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이 고백하는 새로운 신조
by Brett McCracken2020-10-20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Each statement on this sign is at root a reflection or distortion of biblical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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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반 트럼프 저항의 일환으로 파생된 세속적 의미의 “종교적” 부흥이 시작되던 그해에, 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를 처음 알아차렸다. 실버레이크(L.A.),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기타 진보적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의 커피숍과 빈티지 미용실 창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소외 집단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 문구 또는 표지판(sign) 이야기이다. 이 표지판은 점진적인 동맹과 포용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표지판을 내건 곳은 “안전지대”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나처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윤리를 믿는 기독교인도 거기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는 일반 주택 마당에 이 표지판의 2.0 버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조(신앙고백)와 비슷한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표방하는 “세속적 종교”라는 모티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 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가장 자주 본 것(남가주 지역에서만 최소한 12군데에서 보았다)은 다음과 같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
과학만이 진짜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친절은 모든 것이다

이런 표지판을 마당에 자랑스럽게 세워 두는 사람들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메시지가 가진 중요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진보적인 이웃과 해야 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공유점을 찾는 상호간의 연결이라는 점이다.


탈 기독교 신조


표지판의 언어가 주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한 줄 한 줄의 의미 속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부담을 내포한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제 이 신조를 한 줄 한 줄 살펴보자.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문제 많은 BLM 조직은 잠시 잊자. 어느 특정 그룹의 생명만 중요시하는 게 내포한 부작용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자. 이 구호가 가진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인간 생명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의 확인에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게 흑인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런 메시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7). 기독교인이라면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종교도 생명의 소중함에 관해서 기독교만큼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피력해야 한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구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 속에 무제한적인 낙태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그 순간 훼손된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권도 결국은 인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실제로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존엄하게 했던 성경(창 1:27, 갈 3:28)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여성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맥래플린(Rebecca McLaughlin)이 지적했듯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는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


진보적 정치 신념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미국 이민 정책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국경과 정책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주장 또한 신학적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는 골로새서 1장 21-22절 “전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를 보라.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불법”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과학만이 진짜이다


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이 이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이 말하는 메시지는 특히 기후 변화와 과학 거부(science denialism)와 관련한 특정한 정치적 분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말하는 현실과 모순되거나 과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과거의 과학자 또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같은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이 짧은 문장으로 된 슬로건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모든 ‘사랑’을 다 긍정하려는 LGBTQ 운동의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표지판에 적힌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로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단지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한없이 자유롭도록,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다 사랑이라면, 그건 결국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 또한 사랑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만, 반역적인 피조물이 아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식의 자기 참조 문장(역자 주: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처럼 문장 자체가 역설을 담고 있다는 의미. self-referential sentence)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친절은 모든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진보적 확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절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엡 4:32), 황금률에 순종해야 한다(마 7:12). 이것은 중요하고 또 성경적이지만, 이 슬로건이 틀린 부분은 인간의 친절이 마치 타락한 인간의 죄성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이 모든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추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은 인간의 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개로 이끄는 친절(롬 2:4)이고 또 구원을 가져다주는 친절(딛 3:4-6)이다.


연결점(bridges)을 인식하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보 진영의 신조가 결코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평등, 존엄성, 사랑, 친절에 대한 진리를 생각할 때, 처음 형성한 기독교 문화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고, 또 기독교의 가치를 철저하게 담고 있는 ‘탈 기독교’ 신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집에 사는 우리는 …”이라고 써서 마당에 세워놓은 표지판이 결코 정치적 도발의 상징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복음적인 초대가 되어야 한다. 종종 모든 문제를 다 휩쓸어버리는 정치적 욕지거리와 두려움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 표시야 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표지판에 담긴 성경적 사상 중 일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심지어 파괴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왜곡은 보수적 우파의 메시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한 신조의 문장 구조는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하는, 예배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마당 표지판에 숨은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달리 말해, 이 표지판을 내건 사람들이 믿고자 갈구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기독교인이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지점이다.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원천과 표준 속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득한 이 표지판은 사실 기독교인을 향해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청이기도 하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흑인의 생명 또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근거는 무엇이지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누군가 남들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때, ‘친절이 모든 것이다’라는 이 말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


탈 기독교 시대를 맞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과거와 다른 종류의 많은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가 적힌 마당 표지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Your Neighbor’s New Creed: ‘In This House, We Believe . . .’

번역: 무제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We can identify and challenge where biblical truth has been distorted or manipulated for partisan purposes, even as we find common grac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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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