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이 가져다주는 변화
by 노승수2020-10-07

신앙 감정론이 말하는 참된 신앙의 감정이란 어떤 끌림이다. 동물들 중에 밤에 다니는 동물을 야행성이라고 하고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들을 주광성이라고 한다. 이런 본성에 새겨진 성질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초자연적인 본성”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신앙 감정론에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표현을 읽을 때 마음에서 떠올리는 것은 가슴에서 뜨겁게 솟아오르는 감격과 같은 감정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신앙 감정론이 말하는 참된 신앙의 감정이란 어떤 끌림이다. 동물들 중에 밤에 다니는 동물을 야행성이라고 하고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들을 주광성이라고 한다. 이런 본성에 새겨진 성질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초자연적인 본성”이다.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믿음을 정의하기 위해서 몇 가지 심리학적인 개념을 동원했는데 habitus라는 습관의 개념을 동원했다. 통상 습관이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반복 숙달된 일종의 적응 기제다. 이런 적응 기제는 기본적으로 획득되는 성질을 지닌다. 그런데 이렇게 획득된 습관이 아니라 “주입된 습관(infusa habitus)”을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성품을 향해 끌리는 감정을 말한다.


인간은 부모가 생식을 통해 유전해준 오염을 가진 채 태어난다. 인간의 전 존재는 죄가 스며들어 그 부패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 그 부패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독특한 습관을 형성한다. 구체적 예시로서 나 자신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내 십대와 이십대에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 혼자 짝사랑 할 때는 가슴이 뜨겁다가 막상 상대가 관심을 보이면 마음이 식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경우에도 거절당하는 것 같은 정서가 늘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인 게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기까지 한 평생이 걸렸다. 지금도 나를 지배하는 밑바닥 정서로 남아 있다. 내 첫 연애는 이런 나를 각성하게 했다. 헤어짐의 과정도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말에 아르바이트를 마치던 날 잠깐 보고 가라는 점장의 말에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음에도 관두라는 말을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은 추석 선물이고 상여금이다. 이런 태도는 어린 시절 주요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양육자의 태도를 거절로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했던 내 태도와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정말 거절당하지 않으려는 생존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정말 진심을 다하는 태도도 거절에서 비롯되었다. 상대를 진심을 다해 이해하려는 태도도 내가 거절당할 때 아팠던 것을 다른 사람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이 일었다. “그분이 날 사랑할리가 없어”라는 막연한 느낌은 늘 나를 괴롭혔고 어떤 성경공부나 지적 이해도 이런 내 정서와 정체성을 바꿔놓지 못했고 늘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움츠러드는 나는 늘 자신을 관계에서 소외시키는 선택을 했었다.


이제 그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가이드를 할 만큼 사랑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이다. 이런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결의 습관이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분명한 정서가 내 안에서 생겼다. 내 청년 시절 이 습관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설명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표현의 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은 주입된 습관이고 본성의 한 부분에 심겨진다. 이 습관은 초자연적인 습관이다. 자연적 방식으로 체득되지 않으며 이 심겨진 습관은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자란다. 믿음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여 은혜의 수단을 강구하게 되면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성화이다. 은혜는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렇게 주입된 은혜는 믿음의 습관이 계속 자라고 강성해지게 한다. 믿음의 습관이 자라서 소망과 사랑의 습관을 불러온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습관은 모두 은혜의 주입의 결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난 초자연적인 습관 곧 덕이다.


이 습관은 그 시초에서 심겨지기는 했으나 은혜의 주입을 통해서 은혜를 먹고만 자라난다. 그것이 자라나는 현장이 교회며 공동체의 현장이다. 성화는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종교개혁 전통은 특정 개인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향해 거룩한 무리라고 일컬은 바울 사도의 저술을 따라 “성도”라고 부른다. 이것은 거룩함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너희 안에”는 우리 개개인 안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midst)” 혹은 “사이에(among)”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관계 가운데 임한다.


바벨탑 사건은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한 것은 생물학적 본성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의 죄의 습관을 유전했다. 그 습관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습관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내가 사람들의 호의가 모호한 신호로 전달될 때, 나도 모르게 거절로 해석하는 것처럼, 또 그 해석이 우리를 소통하지 못하게 하고 움츠러들게 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한다. 바벨탑은 단지 언어의 장벽만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이 각기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하는 것은 단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믿음의 습관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고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은 심겨진 것이지만 사랑은 연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강화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습된 습관이라는 말이다.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므로 은혜의 의해서 형성된 습관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바로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신뢰 관계 속에서 영적 걸음마를 배우는 일이다. 가정과 어머니로부터 우리가 걷고 말하고 일어서며 좌우를 분간하고 옳은 일을 배우는 것처럼 영적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우리는 이 영적 습관을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 소통의 감정이 바로 거룩한 감정이다.


현대 심리학은 아이가 어려서 형성하는 애착이 아이가 장차 사회성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건강한 애착은 타인을 신뢰하게 만들고 그 신뢰의 경험이 공동체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사람의 성장과정이 이러하듯이 영적으로 출생한 신자는 교회로부터 이런 애착을 경험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건은 주권적이며 우리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으나 성화의 과정은 바로 이 은혜의 분여(impartation) 과정을 통해서 사랑의 교제에 대한 경험의 누적으로 형성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교제 속에 있다.

바벨탑은 단지 언어의 장벽만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이 각기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하는 것은 단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믿음의 습관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고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노승수

노승수 목사는 경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학위(MDiv),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핵심감정 시리즈(탐구, 치유, 성화, 공동체)’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