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혁명 가운데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by Sam Allberry2020-10-09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금지시킬 때에는 항상 더 중요한 뭔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Every time God gives us a prohibition, he’s protecting something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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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자 아티클을 통해 살펴본 문화적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다음 일곱 가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1. 잘 들어야 한다


목양 사역에서 가장 저평가 받는 구절 중 하나가 이것이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몇 장 지나면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구절이 또 나온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누군가가 어디에서 왔는지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 들어야한다. 우리의 마음은 “깊은 물”이다. 누군가가 내게 준 첫 인상과 처음 말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을 드러낼  뿐이다. 잘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수면 아래 상대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상대가 좋아한다고 추측하지 말고 반드시 물어보라),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겪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바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경험한 기복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엇을 그들과 나눌지, 또 언제가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되는지를 아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인생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예수님에 관해서,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예수님에게 의지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게 좋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성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들고 또 동시에 도전을 주는지에 관해서 말하는 게 좋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과 더불어 삶에 있어서 불안함 그리고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숨겨진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 항상 만족감을 주는 그 생수를 어떻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게 좋은 방법이 된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때 생기는 위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계속 떠든다는 데에 있다. 상대가 민감해하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떠드는 건 우리의 무감각함을 드러낼 뿐이다.


2.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건 특정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


얼마 전 캐나다의 한 일반 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후 한 학생이 다가왔다. “저는 게이이고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대학에서 소수자 옹호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고는 한 목사님과 함께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이 나를 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끌었던 소수자 옹호 그룹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호는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르다. 조만간 퍼레이드가 있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도와야 한다. 페레이드를 여는 달(month)이 되면 우리는 어떤 회사가 우리를 가장 많이 후원했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지 않았다.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동일했다. 그 순간 나는 평등에 자부심을 느끼는 현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결코 얻지 못하는 진짜 평등이 복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기독교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한 그룹에 대해 하나의 규칙 세트가 있고, 또 다른 그룹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게이 커뮤니티를 미워하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소수자를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한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이 우리 모두를 어떻게 평등하게 만드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신다. 우리 모두는 다 타락했고 특히 성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망가졌다. 우리 모두는 다 무질서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누구도 이 성적인 영역에서 완전하지 않다. 예수님을 바로 따르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특정한 성적 욕망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결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잘못된 곳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와 자아 감각을 찾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한다. 성별 위화감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육체적으로 부서진 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얕보는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형태로 타락한 성소수자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 중 누구도 괴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을 겪은 몸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성별 위화감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위화감이 주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내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모든 성적인 죄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성적 죄는 다른 죄보다 더 끔찍하다. 그 중 어떤 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한 연합을 드러내는 창세기의 청사진에서 크게 벗어난 사실을 대표하기도 한다. 수간은 간음보다 더 심각하게 벗어난 죄이고, 동성애는 이성애보다 더 심각한 죄이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중 누구도 우월감을 느낄 근거가 없다. 우리 모두는 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비춰볼 때 비극적일 정도로 부족하다.


따라서 특히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복음의 측면을 설명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3. 모두에게 적용되는 제자도의 대가를 인정하라


소수자의 길을 떠나서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치르는 제자도의 대가는 더 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의 대가는 모두에게 다 동일하게 크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우리가 가진 깊고도 은밀한 욕망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정체성(identity)” 앞에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부인해야 한다” 앞에 놓았다.


이런 부르심은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따를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셨고(35절), 그분에 대한 순종이 생명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역설은 이런 상실을 겪음으로써 사실상 우리는 진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내 자신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 가장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제자도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단지 소수자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그건 잔인하고 부당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제자도로 인해 치르는 대가가 소수자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크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라


내 친구는 평소에는 너무도 예뻐하는 두 살 딸이 있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예쁘지만은 않다고 한다. 글쎄, 도전감을 느끼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두 살짜리 아기는 음식 투정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자녀가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입장에서 음식을 들고 던지기까지 하는 아이의 밥 먹이는 시간은 힘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치 이런 두 살짜리 아이처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해놓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성적 윤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하나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상은 무작위인 거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이 왜 그것을 말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합리성과 선함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금지시킬 때에는 항상 더 중요한 뭔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 뒤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임의적이지 않을 뿐더러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생명이 되는 것을 주기 위함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뭔가를 거절할 때 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뭔가를 허락하신다. 우리가 결혼과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 특히 결혼과 성이 단지 인간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오늘날 깊고 죄악된 욕망과 싸우는데 필요한 완전한 영적 자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수세기 전에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애정이 분출하여 밀어내는 힘”이다.


반박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비 성경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깨울 수 없다.


5. 성경 줄거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결혼은 성경적-신학적 주제이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의 결혼으로 끝난다. 처음 결혼은 마지막 결혼을 가리킨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모인 정원에서 성경의 줄거리가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남녀가 모여 하나가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의 결혼이 작별을 고하고 예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궁극적인 결혼을 위해 무대를 떠날 때, 결국 하나가 될 하늘과 땅의 궁극적인 결합의 그림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이건 이 땅을 사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복음의 형태를 가리키고 있다면 독신은 복음의 충분함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유일한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정의를 훼손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성경 전체의 내용에 반하게 된다. 우리의 결혼 신학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결혼에 대한 견해를 바꾼 교회는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회를 나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또한 인간의 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신학적 성찰과 토론의 핵심을 상기시킨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말할 때면 반드시 이성애라는 맥락 안에서만 유일하게 경건한 행위로 받아들이는 점을 고려할 때,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동성애 신학을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 신학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체가 복음 신학이다.


6. 계속해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완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았으며 성관계도 없었다. 따라서 적절한 맥락에서 볼 때, 성이라는 게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수적일 필요는 없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손상하게 되고, 그건 바로 성경이 경고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되는 것이다(요일 4:3).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는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죄이고(마 15:19-20, 외 유사 구절), 단순한 행동이 아닌 성적 욕망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마 5:28),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능하다고 가르쳤다(마 15:19-20). 그리고 결혼에 대한 유일한 경건한 대안은 독신 생활이라고 가르쳤다(마 19:10-12).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결코 성 윤리에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았다.


이런 예수님의 입장에 찬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문제는 단지 교회, 복음주의, 기독교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이런 입장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결혼과 성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믿는다. 누군가가 결혼에 대한 내 견해를 버리도록 하려면 그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버리도록 설득해야 한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춤추고 있는 무용수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가 우리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세상 사람들은 결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분만이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요 6:35). 사실상, 바로 이 점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성욕을 창조하셨다. 인간 속에 더 깊고 강력한 갈망이 있을수록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욕을 만드셨고, 성욕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의 통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성적인 만족이나 현대의 우상은 결코 우리의 갈망을 채울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 채우시는 유일한 분이다.


7.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1장의 앞 구절 사이를 읽으면,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바울이 자기들한테 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복음 메시지는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결실을 맺었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에서 특히 큰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정점이었다. 로마는 헬라적 사고와 영향력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 제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에 로마에 쉽게 가지 못하는 게 결코 마음이 꺼려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을 부각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9-16, 밑줄은 저자의 강조).


당시 로마 기독교인이 다른 로마 시민들을 보면서 저들에게는 복음이 통하지 않겠구나 라고 느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소수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에게만은 복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죄인이 다 똑같을 뿐이다. 하나님에게는 소수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더 고려해야 할 그 어떤 추가적인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문화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의 역할이 단순히 “있는 자리를 지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추수할 곡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

번역: 무제

그렇기에 결혼에 대한 견해를 바꾼 교회는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회를 나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It’s why I’ve yet to see a church that has changed its view of marriage without also ultimately changing its view of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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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am Allberry

샘 올베리는 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의 국제 강사로 섬기며 미국 TGC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Is God Anti-Gay?'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