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로 도전받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by 장대선2020-09-17

‘그리스도인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국가와 관원들이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게 된 심령의 참된 자유로움과 아울러 그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강제적인 조치에 의해 그 자유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가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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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헌법적으로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입장이 너무도 분명하지만, 소위 극우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성명, 그리고 가두시위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모양새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가 철저히 분리되어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논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어떤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야말로 현실 가운데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사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용인되고 제국의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황제’의 통제 아래에 기독교가 존재하며 확장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Ⅰ, 재위 306-337)야말로 국가교회의 원형을 만든 가장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국가교회로서의 기독교는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황제까지도 교회에 복속되는 역전이 이뤄졌는데, 제국을 아우르는 교황의 막강한 위세를 지녔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바로 그러한 역전의 대표적인 체제였을 것이다.


‘세속화’의 본질, ‘이원론’에 있어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를 ‘신정정치’(theocracy)의 정치체제였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는 결코 신정정치의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왕’과 ‘제사장’의 권한이 엄격히 구별되며, 또한 왕과 제사장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체제 가운데 있었다. 특별히 ‘왕’뿐 아니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구별되는 독특한 체제야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 까지 지지하게 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진정하고도 바람직한 관계설정과 체제였다.


그런데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적인 기초와 19세기의 본격적인 ‘세속화’(secularization) 가운데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철저히 분리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사실 세속화의 본질인 ‘이원론’(dualisme)에 근거한 하나님의 소외와 배제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저 멀리 천상으로 축출되고, 지상의 모든 영역들은 철저히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의 영역, 즉 ‘세속’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론적 배경 가운데서 급기야 ‘사신신학’(Gott-ist-tot-Theologie)이라는 괴물까지도 세속적 교회들 가운데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일부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국가 외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지지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사실 바로 이러한 세속화를 향한 이론적 디딤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팬데믹(pandemic)의 상황 가운데서의 방역을 위해 여러 나라들이 시행한 국가적 통제 가운데서, 현실 가운데 정교분리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질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고 말았다. 오히려 방역을 위해 종교적인 모임과 회합들조차도 잠정적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뜻하지 않게 봉착하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설정에 있어서의 분별의 문제가 우리 현실상황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 강제할 수 없는 자유

그런데 교회와 국가의 행정력에 의한 예배의 통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국가와 관원들이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의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약 4:12; 롬 14:4),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는 신앙고백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정적 명령을 현재 여러 국가들의 행정부가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해묵은 이데올로기(Ideology)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소위 좌파정권의 기독교 억압을 포석으로 하는 정권 차원의 정책이라고 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그 자체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결코 콘크리트 장벽과 같은 것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별개일 수가 없음을 암묵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국가와 관원들이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게 된 심령의 참된 자유로움과 아울러 그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강제적인 조치에 의해 그 자유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가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의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고 한 문구는, 곧장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골 2:20, 22-23; 갈 1:10, 2:4-5, 5:1).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 16-17; 렘 8:9).”라는 문구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구로 된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독교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광장에 나가서 반정부적인 시위를 벌였던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강요에 의해서든 금전적인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별 깊은 사고와 통찰이 없이 군중심리로 따라 나간 자들까지도 모두 ‘맹목적인 신앙’ 혹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양심의 자유를 그 스스로 파괴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경을 따르고자 하는 장로교회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판) 제20장은 4항에서 또한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심으로 세운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간 보존하게 하기 위해 의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의 권세이거나 교회의 권세이거나 간에 어떠한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마 12:25).”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할 때에도, 혹여 그것이 합법적인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합법적[법률이나 제도로 보장된]이고 정중하게[정식적이고 불필요한 잡음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 않게] 이의를 제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 스스로 저버리기 쉬워


그러나 사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양심의 자유는 결코 인위적인 법률이나 억지에 의해 제한되거나 속박될 수가 없는 성격을 지닌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서 얻게 되는 자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 곧 원죄(original sin)와 그로 말미암은 죄책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또한 정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뿐 아니라 무엇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으로서의 율법에서 온전히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으로 인해 얻게 되는 자유와 적극적인 율법에의 순종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능동적이고 진정한 자유다.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한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바로 그 자유함과 해방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그 어떤 정권, 그 어떤 이데올로기, 그 어떤 정책이 방해하거나 파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있어 우리들이 항상 유의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저버리거나 파괴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한 연약함이라는 점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우리에게 가해진 탄압과 핍박, 그리고 모진 고문과 사형의 박해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속에 있는 욕망과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일본신사에 참배하는 것조차도 배교와는 무관한 국가적 충성이라 변명했던 것,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맞춰서 기독교 스스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온갖 의식들과 미신적인 것들까지 예배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여겼던 역사야말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생생한 실례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누구에게 매여 있는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이 생길 때에, 과연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는가? 당장에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목사를 찾거나, 심지어 도움을 주는 교회의 목사와 그 교회의 규모를 의식하여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종속됨이야말로 양심의 자유는 물론이고 이성의 자유조차도 저버리고 스스로를 노예와 같이 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직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누군가 마치 독재자와 같이 우뚝 설 때에, 그 자가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심지어 집사 혹은 회중(flock)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제정된바 합당한 교회의 질서와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의사를 투영하고 관철시키는 독재자로서, 교회 안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옭아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와도 같은 행실을 일삼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유념하고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서 얻게 되는 자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 곧 원죄(original sin)와 그로 말미암은 죄책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또한 정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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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