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이중주
by 김선일2020-09-02

AG는 개인주의적이고 율법적이며, 사후에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가느냐로 복음을 채색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해서 지옥의 위협으로부터 구출을 받는 것이 초점이다. 반면 KG는 이 세상의 개선과 변화에 무게를 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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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이머징 교회 운동가인 디이터 젠더(Dieter Zander)가 말하는 낯선 복음(alien gospel)과 왕국 복음(kingdom gospel)의 대비를 소개한다. 낯선 복음을 줄여서 AG로, 왕국 복음을 KG라고 부른다. AG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하세요. 그러나 인간은 모든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를 대신 갚게 하셨어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지불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겁니다.” 젠더가 이를 낯선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온전하게 드러내는 복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젠더는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되면서, “다른 종류의 삶이 도착했는데, 이는 현존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의도적으로 만물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구속하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AG는 개인주의적이고 율법적이며, 사후에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가느냐로 복음을 채색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해서 지옥의 위협으로부터 구출을 받는 것이 초점이다. 반면 KG는 이 세상의 개선과 변화에 무게를 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 두 종류의 복음과 거리를 두며 평가한다. 먼저 AG 모델이 지니는 약점을 이렇게 말한다.


① 이 모델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죄로 판정함으로, 죄의 자기 주장성이나 우상숭배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죄가 얼마나 내재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오히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②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 순복하고 자비를 간청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③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치 나쁜 삶을 사는 것에서 죄를 용서받고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전환된 정도로 생각한다.


그는 또한 KG 모델의 약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① 이 모델은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속자이신 예수님을 강조하기보다, 용기와 사랑의 특별한 삶을 산 모델로서의 예수님이 부각된다.
② 죄 용서와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온 삶을 다해 진리를 믿고 실천해야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고 그 안에서 살도록 초청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에서 이타적이고 공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팀 켈러는 그가 가장 강력하게 지적하는 율법과 복음의 혼동을 이 두 모델의 대비에서도 발견한다. 두 모델 모두 ‘만일 내가 바르게 산다면 나는 용납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율법의 내적 논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메시지는 죄의 모욕성, 깊이, 파괴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검의 ‘날카로움’을 놓친다.”


나는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해서 AG의 메시지를 강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또는 ‘성령이나 방언을 받으려면’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다 실토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부흥사의 엄중한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기껏 초등학생 나이에 내가 몰래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다 기억해내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특별히 뜨거운 확신도, 신묘한 경험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 신앙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가장 간절했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영적 열등감과 좌절감이 자리 잡은 시점이었다. 물론 회개하려는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복음과 대면함에 있어서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깊고 오묘한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철저한 회개의 성과를 이루었느냐에 맞춰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의식 뿐 아니라 자기 인정의 욕구가 강해지면, 비록 신앙의 지식이 쌓이더라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은혜에 보답하여 그분을 감동시키기라도 해야 한다는 욕구에 쉽게 넘어간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부응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KG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최근의 필요와도 잘 연관된다. 세상 변혁의 비전 자체가 비성경적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AG와 마찬가지로 KG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신 일에 우선적으로, 깊이 천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있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셨는지,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급진적 은혜를 베푸시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셨는지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는 AG와 KG를 저울질하며, 상황에 따라 한쪽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혼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종종 일어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복음의 계명(또는 예수 신경 Jesus Creed)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명시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이유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독교 복음의 대표 메시지로 제시한다. 그러다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하나님 사랑에 치중하고,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이웃 사랑을 더 강조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해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 계명은 복음이 아니다. 이는 말 그대로 명령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큰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복음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이 가장 큰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대 전제에 철저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나 개인에 대한 사랑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사 회복케 하시려는 창세 이전의 계획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디이터 젠더는 낯선 복음(AG)을 극복하고자 KG(왕국 복음)을 제안했고, 팀 켈러는 그 두 모델  모두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유형임을 지적했다. 이에 나는 갱신된 AG와 KG의 공존과 통합을 제안하고 싶다. 단어를 살짝 바꿔보자. A는 Atonement Gospel이라 부르고, KG를 His Kingdom Gospel이라 하자(인간의 이상향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예수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속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우리에게는 AG와 KG가 항상, 동시에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 사역은 깊이 있으면서도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는 나의 모든 죄와 허물, 약함을 친히 아시고 어루만지시며 용서하실 만큼 섬세하고 심오하다. 또한 그의 구원은 나라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우주를 회복시킬 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톰 라이트가 스콧 맥나잇의 책 ‘예수 왕의 복음’(The King Jesus Gospel)의 서문에서 개인적 속죄의 복음을 헬리콥터의 회전날개에 비유한 적이 있다. 회전날개 없이는 헬리콥터가 이륙할 수 없기에 회전날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회전날개만이 헬리콥터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초적 추동력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속죄의 복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며 지향해야 할 모든 여정이다. 속죄의 복음은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헬리콥터의 정상적이고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회전날개는 지속적으로 기능을 해야 한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나라 여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력을 공급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신다는 담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담대하고 멋진 희망의 이야기 속에서 왕이신 하나님이 바로 나와 같은 이방인이고 사소하며 희망 없는 개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지옥을 면하게 하는 구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 사역에 동참하게 할 정도로 존귀하게 하시고 자녀와 상속자로서의 권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이 복음을 듣고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어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의 은혜는 나의 모든 죄와 허물, 약함을 친히 아시고 어루만지시며 용서하실 만큼 섬세하고 심오하다. 또한 그의 구원은 나라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우주를 회복시킬 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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