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믿습니까?
by 이승구2020-08-31

우리들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창조 이전”이 있었으며, 그 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의 교제만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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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단순함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나오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복잡해진 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17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므로 넓게는 지난 300년 동안, 그리고 좀 좁혀 본다면 지난 100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매우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으면 이전 시대의 순전함에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제2의 순진성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창조에 대한 기본적 논의를 해 보자.


신조들과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


고대 교회의 신조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문들을 제시하신 분들은 창조에 대해서 믿는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말했다고 할 수 있다.
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②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교부들과 개혁자들은 성자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③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결국에는 창조주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 존재와 형태와 외관과 다양한 기능들을 부여해 주셨다.
④ 섭리와 연결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그의 영원하신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유지시키시며 통치하셔서, 인간들을 위해 있게 하시며, 다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


여기까지는 창조를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 신조들과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를 더해 ⑤ 이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창조를 믿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앞의 네 가지를 성경에서 이끌어낸 창조에 대한 가르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창조를 인정한다는 것의 함의


우선 위의 ①~④까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주장하는 것인지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이런 의미의 창조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존재하셨었다고 단언해야 한다. 만일에 창조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든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실질적으로는 없는 것이라고 하든지, 창조자와 피조계는 이를 테면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 모두가 자연이라고 한다든지(Baruch Spinoa)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믿는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피조되지 않으셨으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홀로 삼위일체적 교제를 나누며 계셨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에 따라서 그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유신론적 창조 이해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전통적인 서구 철학적 유신론(the classic theism)인데, 이를 말하면서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아직 삼위일체 개념을 생각하지 말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의 상당수는 끝까지 삼위일체 개념을 넣지 말고 생각하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하는 유신론을 기독교 유신론(the Christian theism)이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지나치게 먼저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접근은 창조에 대해서도 다양한 잘못된 이해를 이끌어 내며, 결국 하나님 이해도 왜곡하게 된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로 분명히 하였으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창조 이전”이 있었으며, 그 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의 교제만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흔히 성경에서 “하늘과 땅”(天地)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그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온 세상 모든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그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 처음 창조하실 때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은 피조계 밖에 있는 것이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오성형식(悟性形式)이므로 그저 사유의 틀일 뿐 사물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사유하려고 할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사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칸트적인 틀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하셨다는 어거스틴적인 이해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진정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적 창조 신앙의 출발점이다.


둘째로,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했지만, 창조사역에서의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할 때,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창조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을 가지고 성부께서만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함께 성자께서 창조의 과정에 함께 하셨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그로(즉, 요 1:1이 말하고 있는 로고스,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한다. 또한 10절에서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고 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한 후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또한 성령님께서도 창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을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창세기 1장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창 1:2)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과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를, 창조의 객관적 원리라고 하고, 성령님을 창조의 주관적 원리라고 표현해 오고 있다.


셋째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피조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이시다. 이 때 우리가 언급할 만한 유명한 구절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기원하였으며, 주를 통해서 이 땅에 있게 되었으며 결국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일종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그것을 현대적으로 보충한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으로 오해하면서 그와 같은 것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본래적으로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과 비교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우연성(偶然性)을 강조한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必然的 存在)이신데 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존재이니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옛날부터 그렇게 표현해 온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들이 신에게 속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인 것이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에게 들어가서 합류하는 것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형태의 만유재신론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와 존재와 양상을 지닌 존재들은 그 다원성과 다수성과 독특성이 다 인정되나, 특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에 비추어 우리의 당위를 찾는 방식의 윤리적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판단 받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한 후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였는지가 나타나게 된다.


넷째로, 창조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만 하시고 그냥 자연법칙을 따르게 하셨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 즉 자연신론(自然神論)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또한 섭리가 창조의 과정이라고 하면서 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과정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창조론은 아니다.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


최소한 이 네 가지를 바르게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① 그 창조의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하며,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여 나가는가? ② 하나님께서 피조하신 피조계를 참으로 잘 돌보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내어 나가는가? 를 통해서 우리가 과연 창조를 실천적으로 인정하는 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그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생각하든지, 배제하려 하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려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여기 하나님의 자녀들의 책임이 나타난다. 따라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피조계를 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을 가진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피조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이다. 이 때 우리가 언급할 만한 유명한 구절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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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