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by 이춘성2020-08-24

사람들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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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정의론: 공정과 정의


많은 사람은 정의(justices)를 공정(fairness)과 같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정의는 반드시 공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John Rawls)는 이러한 주장을 이론으로 발전시켜 정치, 경제에 적용하였다. 모든 사람은 동일 조건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공평이며 정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마다 타고난 배경과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거나 결정된 조건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경쟁에서 불공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롤스는 단순히 기회만 동일하게 주는 것만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존 롤스에게 불공정이란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롤스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무지의 장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모의 도움과 같은 선천적 조건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용시험에서 모든 조건을 공개하고 면접을 보는 것보다 성별, 출신지, 학력과 학교, 인종, 나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롤스는 공정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공정이란 조건을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출발의 조건, 아니면 과정의 조건 둘 중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출발을 아무리 같게 만든다고 하여도 같을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롤스의 정의는 장애인을 제외한 정상인을 위한 정의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였을 때, 누군가는 더 노력해서 남들보다 앞설 것이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을 들어, 남보다 노력해서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공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공정성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에게는 흑인의 공정성, 여자에게는 여자의 공정성, 남자에게는 남자의 공정성, 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공정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정의론의 다양성


세상에는 정의에 대한 이론이 매우 다양해서 그 이론들을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성경의 정의 개념조차도 열 개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정의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정의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시대의 유대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하나님과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이들 또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따른 가변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서로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위선적인 삶을 정의로운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이 아무리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만들어도, 결코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서 ‘더 나은 의’라고 부르신 그 정의란 무엇일까?


더 나은 정의


팔복(마5:3-12)에는 의,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디카이오수네(δῐκαιοσῠ́νη)가 두 번 나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팔복의 구조를 보면, 정의에 대한 복인 네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앞의 1, 2, 3번째의 복의 결론과 5, 6, 7번째 복의 결론이다. 이것은 문학적 구조상 ‘정의’라는 덕목이 팔복이라는 집을 떠받치는 두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1) 죄를 응시하는 정의


팔복을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팔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자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고통하고 아파하는 자다. 셋째로 “온유한 자”는 자신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다. 이 세 가지 복은 모두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있다. 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 안에 정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정의를 갈구하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상태다. 그러므로 정의는 죄를 바라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의 차이점이다. 세상은 죄를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규칙과 윤리를 찾는다.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정의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의의 규칙을 만든들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가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정의를 이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2)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정의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복은, 정의로 충만해진 신자를 향한 복이다. 다섯 번째 복은 정의에 충만하면 타인의 어려움과 궁핍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여섯 번째 복은 정의로 가득하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대면한다. 일곱 번째 복으로 정의는 화평(평화)을 추구하게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일어나고, 불화한 사람들을 화해시킨다. 그런데 세상 속에 이기적이지 않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해보라. 세상은 그를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출현은 자기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탁월한 정의 앞에서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정의는 빛바랜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의 정의


팔복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규칙이나 윤리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정의의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정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 정의를 규정하고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전적인 무능을 깨닫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단계는 정의에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에게 정의를 먹여줄 어떤 존재를 요청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정의를 공급해주고 채워주신 후에,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고, 평화를 사랑하며, 이런 가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의 정의의 본질은 네 번째 복에 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고 마셔서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 바로 예수님 자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것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비교해보자.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체의 구조상 수미쌍관(인클루지오)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팔복, 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가 마태복음의 후반부에서 가시적이며 육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예수님 자체다. 예수님이 정의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도덕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다.


그리스도인의 정의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예수님 자체다. 윤리적 항목이나 원리가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열매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그분을 통째로 먹고 마시는 놀라운 일, 그 신비를 경험하지 않고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산다하여도 그 안에는 정의가 없다. 반대로 정의의 열매가 없는 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잘 알아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일이 없는 자, 곧 정의가 없는 자다.


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한때 천사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부터 추락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은 종교인, 정치인, 교육자 등 다양하다. 멀리서 보면 정의롭던 사람이 가까이 가면 악취가 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복 받은 자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 정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복 받은 자라는 선언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갈구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실패하고 낙망하여 다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지하여 의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의 의, 정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정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호도 윤리 운동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에서 시작하여 신비로 끝난다. 이러한 신비가 없는 정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며 여기에 닿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가 빠진 윤리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교회는 수많은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한 공명선거 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인 청년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은 교회가 윤리적이지도 않고,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없다는 비판이다. 이 시점에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외치던 정의가 예수님의 정의였는지, 아니면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윤리 운동들 중 하나로 결국 위선으로 막을 내린 그런 유의 세속의 정의였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성찬의 신비가 사라진 정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런 정의로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예수님 자체다. 윤리적 항목이나 원리가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열매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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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