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by Brett McCracken2020-08-29

자연은 가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혼란 속에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줌으로 온라인 세상을 견디며 생긴 트라우마와 피로를 치료하는 반가운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Nature is clarifying reality in the confusion of our virtual world—a welcome balm for the trauma and exhaustion we endure online.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몇 주일 전 우울한 헤드라인 소식과 한숨만 나오게 하는 소셜 미디어에 지친 한 주를 끝내고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한 살이 된 아들 체트는 나뭇가지를 모으거나 벌레를 잡았고 나는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 뻗은 캘리포니아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있었다. 위를 향해 뻗은 나뭇가지는 마치 내 눈에 찬양을 하기 위해 위로 올린 팔처럼 보였다.


이사야서 55장 12절에 나오는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는 구절과 더불어 이 나무는 실로 창조된 모습 그대로, 창조 질서에 순종하며 기쁨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나무는 끝없이 이어지는 디지털 인생에도 무심하며 오로지 단순하고 조용하게 나무로서 받은 소명인 가지를 뻗고, 그늘을 만들어주며, 산소를 생산하고, 그리고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향해 위로 또 위로 뻗어가는 소명을 완수하며 묵묵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나무의 나무됨을 온전히 느끼던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평안과 경이로움 그리고 예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가 다 이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창조주를 향한 끝없는 찬양을 올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우리 인간은 사실상 이런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쁨에 찬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단순한 생활을 하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바쁘기만 하다.


아마 당신도 이런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과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향과 목적을 느끼던 순간 말이다. 꼭 나무 아래 누었을 때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강, 바닷가 또는 놀라운 산세를 바라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우리에게 말을 한다(시 19).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게 하며 또 감사하게 한다(롬 1:19-21).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자연은 가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혼란 속에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줌으로 온라인 세상을 견디며 생긴 트라우마와 피로를 치료하는 반가운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의 지혜 피라미드에서도 자연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은 이유이다.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언제나 웹 서치를 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삶에 활력을 주고 지혜를 솟구치게 한다. 여기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연은 객관적이다


사실과 진실은 이제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객관성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좌파에 대한 비판적 이론과 더불어 “전문가는 엘리트주의자!”라는 우파에 대한 회의론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고, 그 결과 이제 현실은 “사실(facts)”이란 것은 거의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조차도 객관성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연이다.


몇 년 전 LA 타임즈에서 나는 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탈 진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정치에 신경쓰지 않는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을 무시하고 날씨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날씨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뿐이다. 그게 다이다. 눈이 내리고 또 태양이 떠오른다. 날씨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에게 똑같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입관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당신이 스스로를 수퍼맨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자기가 원래 물고기인데 인간이라는 잘못된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물 속에 들어가면 몇 분 안에 죽을 뿐이다. 자연은 이래야 하고 또 저래야 한다는 인간이 가진 주관성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티모시 트레드웰(Timothy Treadwell, 미국의 곰 애호가이자 환경보호론자)에게 비극이 생긴 이유이다. 그는 알래스카 곰과 함께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결국 곰에게 잡아먹혔다.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는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Grizzly Man)’을 제작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미친 세상에서도 여전히 온전함을 유지하는 자연에는 선천성(givenness)이 있다. 그 선천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연이 주는 선천성을 무시하고 마치 생물학적 성이 존재하지 않는 양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을 그리스도인들이 더 포용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점점 더 손상되어만 가는 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또 뭔가를 진정으로 제대로 아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면, 그런 사람에게 과학은 적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밖으로 나가서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라. 그렇게 함으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이 우리 시대가 가진 형태가 허물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도록 만들라. 우리 속에 제대로 된 생각을 불어넣도록 만들라. 


자연은 지친 마음과 영혼에 안식을 준다


너무도 바쁘고 자극성이 강한 지금 사회에서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우리를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영혼과 폐와 뇌에 좀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자연은 고친다: 왜 자연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만들까(The Nature Fix: Why Nature Makes Us Happier, Healthier, and More Creative)’에서 플로렌스 윌리암스(Florence Williams)는 실제로 도시 생활이 인간의 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생활은 정신분열증, 불안감 그리고 정서적 장애의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인다. 게다가 오늘과 같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필터링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엄청난 과부하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있을 때 뇌가 처리하는 정보량은 훨씬 더 줄어든다. 그 결과 깊은 사고와 명상 또는 묵상과 같이 높은 수준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뇌가 최적화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두 개의 논문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에 중독된 아이들을 숲으로 보내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돌아온 후 뇌를 조사했는데, 뇌 속의 코르테솔(cortisol, 부신피질 호르몬의 하나) 분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늘고 초조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안정 효과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한국과 일본과 같은 국가로 하여금 과도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유령이 지배하는 도시를 탈출해서 걷기와 산소 호흡, 그리고 재조정 등을 할 수 있는 “치유의 숲”까지 지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도 “숲 요법”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으며 일부 의사들은 “자연 처방전”을 작성해서 환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도록 처방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이 효과가 있을까?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영적인 현실이 그 답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평화를 느끼는데, 그건 인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그건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인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 거칠게 숨을 쉴 때나 또는 습도 높은 벌판에서 땀을 흘릴 때 등등),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조주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바른 곳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가 웬델 베리(Wendell Berry)가 쓴 ‘거친 것들의 평화’인데, 이 시는 정신적으로 초조한 세계에서 자연이 주는 선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절망이 커지면
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다가 깬다
나와 내 아이들의 삶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무서워서
나는 청둥오리가 있고 큰 왜가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물가로 내려가 눕는다
나는 야생이 주는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아무도 슬픔을 미리 예측하면서 고통을 주지 않는다
나는 고요한 물이 주는 존재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리 위에 뜬, 찬란하게 빛날 시간을 기다리는 별들을 느낀다
아주 잠깐 나는 세계가 주는 은혜 속에서 쉬면서 자유를 느낀다


‘거친 것들이 주는 평화’는 내가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를 보면서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관점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깨달음이었는데,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정신없고 분주하더라도 이 자연은 여전히 원래 갈 길을 변함없이 간다는 것이었다. 새 아침을 맞아 우는 새소리에서부터 석양에 우는 귀뚜라미까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서 여름날 습기찬 천둥번개까지, 아기의 첫 울음에서부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숨까지, 자연의 사이클과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전 3:1).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창조라는 설계 속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게 함으로 평화를 준다. 절벽 끝에 한번 서보라. 굉음을 내는 폭포 앞에 서보라. 아니면 그냥 별들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당신이란 존재가, 그리고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라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작은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인간됨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다. 놀라운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종의 예배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이라는 영감을 불어넣는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3-6)


우리의 작음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크심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이야말로 진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개미집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만드신 분, 플라타너스 나무의 견고한 몸통 뿐 아니라 장미의 섬세한 꽃잎까지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Drained and Depressed by the Internet? Go Outside

번역: 무제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입관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다

Nature does not discriminate. It is not compromised by bias.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