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악플
by 정요석2020-08-15

비평가는 비평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미추(美醜), 선악, 장단, 시비를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치열한 사고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가 먼저 좋은 철학과 시대정신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것이 비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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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진 잘 모르겠지만, 죽는게 쉽진 않겠지만 … 많이 미안해 엄마 그냥 미안하단 말밖에 못하겠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 …”


위의 글은 2020년 7월 30일에 스물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한 배구 선수의 마지막 글이다. 그녀는 2013-2014시즌 프로배구 선수로 데뷔했을 때 별을 딴 듯 기뻐하였다. 하지만 주전이 아닌 백업과 다른 포지션의 대체 선수로 뛰면서 자신의 기량을 100퍼센트 펼치지 못했고, 그때마다 “네가 리베로냐”, “네가 배구 선수냐” 등의 악플에 시달렸다. 그녀는 7월 12일에 있었던 마지막 인터뷰 영상에서 “계속해서 (악플에) 시달리고 부담감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분석도 많이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며 감독님께 찾아가 “너무 힘들다”, “악플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시즌이 종료되기 전에 은퇴를 결심하고 팀을 떠났다. 하지만 “돈 떨어졌다고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는 식의 악플이 이어졌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먹던 수면제의 복용량이 점점 늘어났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운동도, 경기도 하기 싫었다. … 다 내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도 그렇고 어긋나 있었다”라고 마지막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IOC 유승민 선수위원은 8월 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스포츠 뉴스 댓글 금지법” 발의를 요청하였다.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는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이미 작년 10월과 올해 3월부터 시행하였다. 다음과 네이버는 8월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도 잠정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선수의 죽음으로 인해 그나마 이런 조치가 가능했다.


그런데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를 향한 댓글이 폐지되면, 앞으로 악플은 사라질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한 나라의 정신과 도덕과 절제의 수준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번 코로나19 대감염 속에서 “K-방역”이란 호칭을 들으며 경제와 방역과 인터넷 보급망 등에서 세계적 수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어 세계로부터 구호를 받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선진국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언론의 감시 기능과 여야의 치열한 경쟁도 중요한 이유에 속한다. 언론은 여러 분야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름 대안을 제안함으로써, 여와 야는 상대방의 조그마한 잘못도 비난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자랑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언론과 정당의 감시와 비판 기능이 도를 넘어 종종 비난과 악담으로 이어졌다. 일반 국민까지도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달 수 있고, 유튜브 제작으로 수익 창출이 되면서 악플과 과장과 왜곡으로 그 대열에 참여하였다. 조회수와 시청률과 지지율의 제고에 관심이 많은 언론과 정당과 유튜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였다. 일반 국민도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연관이 없는 사항임에도 연예인과 운동인에 대한 험한 악플을 집요하게 생산하였다. 그 결과 그 선수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과 공인 중 일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정당한 비판과 징계를 받기보다 언론과 정당의 과다한 비난과 악플러들과 유튜버들의 모욕과 조롱을 피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비평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함께 문학의 5대 장르에 속한다. 비평가는 비평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미추(美醜), 선악, 장단, 시비를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치열한 사고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가 먼저 좋은 철학과 시대정신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것이 비평이다. 창작자의 관점을 넘어서는 참신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탄탄한 철학 사상과 풍성한 사례에 근거하여 제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과 다양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식 주례처럼 작품의 장점만 이야기하는 주례사 비평은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식구 감싸기의 짬짜미로 사회 전체를 답보와 퇴보에 빠지게 한다. 따끔한 지적과 통찰이 없는 비평은 창작자와 사회 전체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결점만 들추어내고, 가능성을 짓밟고, 인격 모독과 성 희롱과 악담으로 가득 찬 비평과 댓글은 인격을 부수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살상무기다. 당사자만 아니라 그 비평과 악플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렇게 비난하여도 괜찮은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또 다른 비난자와 악플러를 꾸준히 생산하여 우리 사회를 더 황폐하고 더 악하게 만들므로 역시 없어져야 한다.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갖기 마련이다. 실수와 다른 시각에 대하여 기본적인 존중과 수용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를 물고 뜯는 형국이 될 뿐이다. 자신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물 때는 괜찮겠지만, 그 칼날이 반드시 자기를 향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야하지 않는가? 조그마한 실수와 죄라도 짓는 날에는 엄청난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므로 늘 긴장하고 남을 의식하고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게 된다. 매 앞에 장사 없듯, 비난과 악플에 장사가 없어, 쌓이다 보면 어느덧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게 되고, 극단적 선택에 이를 수 있다.


건전한 비평과 선플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 일만 달란트의 죄와 실수로부터 용서 받은 자가 신자들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지금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격려하여 주시지 않는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가혹한 비난과 악플이 아닌 생명과 부활이라는 사랑과 세움으로 가득 찬 판결문을 받은 신자들이 어찌 조롱과 모욕과 희롱이 배인 비난과 악플로 공격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고, 바보라고 말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살인에 해당하여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마 5:22) 말씀하셨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이 “평화롭고,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을 요구하고(제135문), “격동시키는 말”을 금지한다고(제136문) 서술한다. 바로 평화로운 말은 생명을 살리고, 격동시키는 말은 생명을 죽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최근에 격동시키는 비난과 악플에 의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아홉 번째 계명이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보존하고 조장하고, 마음으로부터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고자질과 아첨과 중상을 하는 자들을 좌절시킬” 것을 요구하고(제144문),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해치고, 거짓 증거를 제공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왜곡하고, 부당한 침묵을 유지하고; 진리나 공의에 대해 편견을 갖도록 의심스럽고 애매하게 왜곡하고, 틀림과 거짓과 중상과 험담과 고자질과 냉소와 욕설을 말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작은 실수들을 악화시키고,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고, 거짓 소문을 내고, 악한 의심을 품고, 불명예와 추문을 기뻐하는” 것을 금지한다고(제145문) 서술한다. 신자라면 각 계명의 요구와 금지 사항들을 읽을 때 마음속 깊이 파고들지 않는가?


통제되지 않는 혀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고,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다. 신자는 마음속의 독한 시기와 다툼을 말과 글로 자랑하면 안 된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면 안 된다. 이러한 지혜는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고, 정욕과 악한 영의 것이다. 시기와 다툼이 묻어나는 글과 악플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발생시킨다. 건전한 비평과 선플은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가져오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약 3장). 신자들은 인터넷에 올리는 짧은 글과 댓글에서도 절제함을 갖추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좋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화평과 관용이라는 기본적 자세는 더 중요하다. 의도치 않게 틀린 내용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거두어들일 수 있지만, 악의가 담긴 비난과 악플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치열한 경쟁과 일등주의가 일상화된 우리나라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선진국 대열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과 효율주의로 인해 억눌린 마음과 팽팽한 긴장은 배출구를 찾아다닐 것이고, 쉽게 비난과 악플로 표현될 여지가 많다. 신자는 이런 치열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완충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일등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이는 것은 더 중요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더 크게 발전하게 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대한민국의 자살률 완화는 신자들이 일등의 경쟁에서 승리할 때가 아니라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일 때 이루어진다. 기독교야말로 사회 전체에 새로운 관점과 통찰이 담긴 건전한 비평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미 그런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십계명의 각 항목에 대하여 서술한 요구와 금지 사항에 풍성히 나와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귀한 보물을 사장시키고, 잠시 도움이 되는 자극적이고 가벼운 내용에 심취하고 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잠 15:23), 또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다(잠 25:11). 신자는 바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 일등의 실적을 올리려고 하기보다 기쁨의 대답을 주려하고, 악플 대신에 선플을 다는 화평과 관용의 삶을 살아 사회에 맑은 물을 흘려 보내자!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이 “평화롭고,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을 요구하고(제135문), “격동시키는 말”을 금지한다고(제136문) 서술한다. 바로 평화로운 말은 생명을 살리고, 격동시키는 말은 생명을 죽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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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요석

정요석 목사는 서강대와 영국 애버딘대학교(토지경제학 석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안양대학교(Th.M.)와 백석대학교(PhD)를 거쳐 1999년 개척한 세움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기도인가 주문인가’, ‘소요리문답, 삶을 읽다(상ㆍ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삶을 읽다(상ㆍ하)’, ‘전적부패, 전적은혜’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