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복음주의자 시대 마감되다
by 이재근2020-08-04

1899년생인 마틴 로이드 존스가 1981년에 죽고, 1984년 5월에 1912년생이던 프랜시스 쉐퍼가 사망했다. 2011년에 존 스토트(1921-2011), 2018년에 빌리 그레이엄(1918-2018), 그리고 올해 패커가 사망함으로써 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이제 모두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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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미권 대표 복음주의자 중 ‘신학’ 분야를 대표하던 저명한 지도자 제임스 인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2020])가 지난 2020년 7월 17일에 만 9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94세 생일을 5일 앞 둔 날이었다. 이로써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은 다섯 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들이 이 시기 기독교 세계에 끼친 포괄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Five Evangelical Leaders)이라는 제목의 책이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캐서우드가 1984년에 출간한 책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복음주의 지도자 다섯 명, 즉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빌리 그레이엄, 프랜시스 쉐퍼, 그리고 제임스 패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어권 복음주의자들로 국내 기독교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학자이자 작가인 캐서우드는 이 다섯 인물과 각각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기때문에 글을 쓰기에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그는 이 다섯 명 중 가장 연장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외손자로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에 1983년에 합류해서 집필 자료를 구했으며, 런던 올소울즈교회의 스토트의 서재에서 한 학기를 보내기도 했다. 프랜시스 쉐퍼가 있던 스위스 라브리에서도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에 있던 제임스 패커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저자는 IVF 활동가이기도 했기에 20세기 후반 영국 IVF의 신앙적, 지적 분위기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던 로이드 존스와 스토트, 패커에게서 엄청난 지적,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로이드 존스, 쉐퍼, 스토트, 그레이엄이 각각 사망한 직후, 세계 기독교계는 넘치도록 많고 다양한 추도문과 평가를 내놓았다. 한국에서도 이들을 개인적으로 추억하고,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거의 한 세기나 되는 일생을 살면서 엄청나게 방대한 유산을 남기고 간 패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그의 일생과 업적, 사역, 작품을 기억하는 추도의 말과 글을 남기고 있다. 필자는 패커가 범개신교권에 남긴 유산을 그가 가진 세 정체성을 기반으로 회고해 보고자 한다. 패커는 활동의 측면에서는 복음주의자였고, 소속은 성공회였으며, 신학적으로는 개혁파였다. 


1. 복음주의자: 활동


패커는 무엇보다도 교파를 초월해서 역사적 기독교 전통과 정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을 지속적으로 대변했다. 이는 그가 처음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고 기독교 신자가 된 배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고전(라틴어, 그리스어)을 공부하기 위해 1944년에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간 그 해 가을에 그는 복음주의 학생 조직인 IVF/IFES와 연결된 옥스퍼드대 복음주의 학생 선교단체 OICCU를 통해 회심했다. 책을 워낙 좋아한 탓에 회심 후 OICCU에서 보조사서로 지내면서 기증받은 기독교 고전서적들을 탐독할 기회를 얻었는데,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의 책이 그에게 특히 깊은 감흥을 주었다. 


복음주의자로 회심했기 때문에 그가 공부하고 이어서 가르치기 위해 선택한 신학교육기관도 모두 복음주의권 신학교였다. 옥스퍼드에서 고전언어를 잘 공부한 덕에 런던 소재 성공회 복음주의 신학대학인 오크힐 칼리지(Oak Hill College)에서 강사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의 복음주의 분위기에 매료된 탓에, 1949년에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한 곳도 옥스퍼드 소재 복음주의 신학대학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이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1950년에는 동료와 함께 조직한 청교도 연구대회(Puritan Studies Conferences)를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개최했다. 그러면서 이 교회 담임목사이자 당대 최고의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던 비국교도(비성공회 신자) 복음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와 교제를 시작했다. 1953년에 성공회 사제로 안수 받은 후에는 역시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교 브리스톨의 틴들 홀(Tyndale Hall)에서 교회사, 종교개혁사, 성경신학 등을 가르쳤다. 복음주의자 교수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IVF와 CU(Christian Union, 영국대학 복음주의 학생조직)의 강사로 자주 초빙 받았다. 


패커를 복음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널리 알린 계기는 그가 1958년에 출판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이었다. 계몽된 지성인이라면 성경을 신적 계시로 믿을 수 없다는 자유주의자와 세속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성경무오설을 포함하여 성경에 근거한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논증했다. 이 책으로 패커는 일약 복음주의권의 지적 대변인으로 떠올랐다. 이어서 1961년에 출간한 ‘복음전도란 무엇인가’(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1961)는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복음전도를 다루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라는 칼뱅주의 요소와 인간의 행동이 강조되는 복음전도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명쾌히 설명함으로써 칼뱅주의 신앙을 가진 복음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는 잉글랜드 성공회 연구소로서 복음주의 대의를 대변하는 옥스퍼드의 라티머 하우스(Latimer House)의 사서와 관장으로 재직했다. 1967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역사의 획기적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전국복음주의성공회대회(NEAC, 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를  킬대학(University of Keele)에서 개최했다. 이때부터  그는 존 스토트와 함께 성공회 복음주의 진영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브리스톨 트리니티에서 부학장으로 일하던 1979년에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패커의 경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국만큼이나 북미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만큼, 캐나다나 미국이 그에게 낯선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가 그의 교수 경력 사상 처음으로 성공회 소속 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은 새로운 모험이었다. 리젠트 칼리지는 주로 평신도를 대상으로 신학과 기독교학을 가르치는 초교파 복음주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북미로 무대를 옮긴 만큼, 더 거대한 복음주의 현장에서 활동한 유익은 컸다. 이때부터 패커는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여러 현장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은퇴가 가까워진 1990년대에는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흠 없는 인물로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패커가 거의 처음으로 동료와 후배들의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정통 신앙을 견지한다고 판단된 이들과 연대하여 ‘복음주의자-가톨릭 연대’(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1994)와 ‘구원의 선물’(The Gift of Salvation, 1997)이라는 문서를 공동 작성하고, 서명한 일이었다. 1962년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구원론을 비롯한 교리의 여러 측면에서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정통에 더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패커는 두 교회의 연대가 신학적, 사회적 진보와 세속화를 막을 수 있는 선하고 유익한 에큐머니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을 교리적, 사회적으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더 보수적인 이들에게 패커의 행보는 일종의 변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 성공회: 소속


보편적인 의미의 범복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패커의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라는 국적과 소속에 의해 진하게 채색된 복음주의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이 특징적 유산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서 그가 특정 사건의 기로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을 때, 성공회 신자다운 결정을 자연스럽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성공회 신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1966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로이드 존스가 이끄는 비국교도 복음주의와 존 스토트 및 제임스 패커가 주도한 성공회 복음주의의 분화를 알린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6년 10월 18일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복음주의연맹(EA) 주최로 열린 제2차 전국복음주의총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개회 연설을 맡은 로이드 존스는 교리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교단에 속한 이들은 그들이 속한 오염된 교단에서 나와서 교리적으로 순수한 다른 교파의 복음주의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은 당시 현장의 복음주의자들을 대신하여 대회 의장 스토트가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속한 주류 대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영적 쇄신을 일으킬 복음주의자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분위기를 무마했다.


로이드 존스의 발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마음으로 영국 내 복음주의의 성장을 위해 한 길을 걸었던 ‘분리파’ 비국교도 복음주의자와 ‘잔류파’ 성공회 복음주의자 간의 형제와 같던 관계는 이후로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1966년의 그림자’가 20세기 내내 영국 복음주의 진영을 따라다녔다. 패커와 로이드 존스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스토트와 뜻을 같이한 패커는 복음주의자로서 대의를 공유하는 자들이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훌륭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말과 글과 행동으로 널리 대변하는 인물로 활약했다. 실제로 패커는 복음주의자이자 개혁파였지만, “성공회는 모든 기독교 세계 가운데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참되며, 가장 지혜로운 유산을 구현한다”고 주장할 만큼 성공회가 고대교회로부터 연속성을 계승한 사도적 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패커가 성공회 소속 성직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는 캐나다 성공회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1979년에 캐나다로 이주한 이후 성공회에 속한 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캐나다 성공회는 1970년대까지 신학적으로 대체로 자유주의적이었으며, 교단의 주요 정치지도자들도 친복음주의인 저교회파가 아니라 친가톨릭적인 고교회파나 친자유주의적인 광교회파가 많았다. 패커가 이주한 직후 1980년대부터 캐나다 성공회 내에서 정통 신앙의 쇄신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나바성공회선교회(Banabas Anglican Ministries)와 토론토 위클리프칼리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초교파신학교인 리젠트칼리지도 이런 복음주의 부흥에 기여했는데, 영어권 세계의 저명 복음주의 신학자 패커가 합류하면서 캐나다 성공회에도 이 영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 여름에 열린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인 Essentials 1994 대회가 중요했다. 패커와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마이클 그린이 대회의 주강사로 참여하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대회가 1967년에 영국에서 패커의 주도로 결성된 전국복음주의성공회대회(NEAC)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3. 개혁파: 신학

                 
패커를 주목받는 학자로 만든 첫 책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20세기 근본주의 성경무오설을 대변한 책이라기보다는, 16세기 이래 종교개혁자들이 신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논증이었다. 특히 그는 19세기 미국 프린스턴의 구학파 개혁신학자 찰스 하지와 B. B. 워필드의 용어를 자기 논증에 빌려와 사용했다. 두 번째 유명저서 ‘복음전도란 무엇인가’는 더 노골적으로 개혁파적인 책이었다. 한국어판 제목과는 달리, 영어 제목이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인데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칼뱅주의 예정론자였던 패커가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세 개의 실재들(realities), 즉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책임, 기독교인의 전도 의무 간의 관계에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 개혁파 신학을 채택한 장로회나 회중교회 같은 교단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개혁파 기독교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복음주의”라 믿었고, 제한속죄나 영원한 형벌 같은 논란이 많은 개혁파 신학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앞장서서 변호했다. 다만, 복음주의자와 성공회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에 그의 개혁신학은 편협하거나 전투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가장 위대한 건설자 중 한 사람이 본향으로 돌아갔다. 패커의 죽음으로 이제 2020년 이후의 복음주의는 이전의 복음주의와는 다를 것이다. 그는 거인이어서 많은 젊은 세대 복음주의자들이 그의 어깨에 서서 성경과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았다. 패커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소리’와 같은 거인이었다. 패커 생전 1997년에 그의 전기를 쓴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패커를 이렇게 평가한다.


“패커는 현대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자기과시의 경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조직으로서 예컨대 ‘J. I. 패커 주식회사’라든지 ‘패커 선교회’와 같이 그의 이름이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한 기구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패커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다. 곧,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만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소리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한 전례의 모습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패커는 그가 맡은 독특한 역할과 부르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때로 그는 인기 없는 소리기도 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것이 청량제와도 같았다.”(맥그라스, 467)

            

패커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다. 곧,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만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소리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한 전례의 모습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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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재근

이재근 교수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TH.M.), 미국 보스턴 대학(S.T.M.)을 거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에서 세계기독교연구소장 브라이언 스탠리(BRIAN STANLEY)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광교산울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