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주일의 참된 의미
by 장대선2020-07-23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방역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내에서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일시적으로 폐하고 각자 온라인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세대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전염병 문제는, 주일예배와 관련된 신앙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주의 날에 교회당에 온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하거나 곤란하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주일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교리문답 ‘안식일의 거룩하게 함’(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을 통해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관련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이 편리한대로 모든 것들을 다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수단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며, 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주님은 모세의 자리(율법의 자리)에 서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도록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이셨다. 앞서 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율법의 가르침]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런즉 율법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한 개혁된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신앙은 전혀 개혁된 바 없이 여기저기 분란만 일으키는 사변적이고 문제투성이인 개혁자가 된다. 즉,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율법의 거룩함과 의가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선후 관계를 크게 오해한 자들이었다.

한편,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7문답)에서 “그것들(봉사의 일들)이 경건의 의무들(예배의 의무들)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에 봉사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이] 틀어지든지 간에, 반드시 교회당에 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엄격하게 속박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라는 구절은,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라고 가르쳤다.


사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을 보이고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거룩히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칫 그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특히 주일에 행하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마일리지를 적립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사(예배)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가 제사와 율법을 준행할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가 전부 다 사실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인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 결과 실제적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우리 자신과 이웃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 즉 예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도록 섭리하셔서 우리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일하시기도 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해와 우리의 타락한 습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는 말씀을 곧장 우리의 영적인 나태와 방종의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유는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 규례에서 용인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마 12:11) 것이 당연한 이유는, 속히 꺼내지 않으면 양이 죽거나 다쳐서 적잖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불가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8문답)에서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그러한 봉사의 일들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필요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와 관계됩니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일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의 일들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재해들, 혹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예배와 경건의 일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과 주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를 하여 이 상황에 성경적으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공적인 행사들에 참여하는 것 외에 각자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모습인지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 아닌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1641년에 윌리엄 구지가 작성한 이 문답들이 영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봉사의 일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일들, 예배당을 향하기 전과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가정과 개인으로서 행하는 예배와 경건의 묵상,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도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 이제 교회는 신자들을 모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성도들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수고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장로들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열심만이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인 ‘치리장로’들이 성도들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본래의 직무수행 없이는, 각자 흩어진 가정에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도록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했던 주일예배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재정립하고,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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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